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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가야의 성립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 조의 기록에 의하면, 3세기 당시에 한반도 남부지역에는 24개의 소국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12개의 소국을 변한(弁韓)이라 하고, 나머지 12개의 소국을 진한(辰韓)이라고 하였습니다. 김해의 구야국(=가락국)은 변한 12국 안에 들어 있으며, 그 변한 12국으로 이루어진 연맹체를 가야사에서는 ‘전기 가야연맹(前期加耶聯盟)’이라고 부릅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서는 4세기 이전의 낙동강 유역에서 김해 가락국의 대표성이 인정됩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맹주국은 김해의 가락국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고학 자료들을 비교해 볼 때, 1~4세기 당시 가야지역의 문화 중심은 김해, 부산, 창원을 둘러싼 경남 해안지대였고, 그 중에서도 김해 지방의 출토 유물은 다른 지역에 비해 압도적인 우월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전기 가야 소국들은 상당한 통치 체제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대체로 비슷한 문화 기반 속에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구야국과 같이 지리적으로 해상 교통에 유리하고 비교적 큰 소국이 대외적인 교섭의 대표 역할을 맡곤 하다가, 차츰 소국연맹체가 형성되었습니다.

가야연맹의 형성 시기는 2세기 후반 정도로 볼 수 있으며, 아무리 늦어도 3세기 전반을 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3~4세기에 변한 12국은 김해의 가락국(=가야국=구야국)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변한 소국연맹체, 즉 전기 가야연맹을 이루고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전기가야의 발전기반

히지키 히지키
청동거울 청동거울

전기 가야연맹이 3세기 경에 김해의 가락국을 중심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기반으로 우선 지적될 수 있는 것은 해상 교통 입지 조건입니다. 3세기 당시의 『삼국지』 위서 왜인전과 조선 후기 『택리지』의 기록으로 보아, 김해는 물결이 완만한 남해 및 서해의 해로를 이용하여 서해안과 남해안의 모든 항구와 교통할 수 있었고, 낙동강 입구로부터 거의 평형에 가까운 수로를 거슬러 올라가 내륙 각지와 연결할 수 있었으며,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의 쓰시마 및 북부 규슈로 향하는 출발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김해의 가락국은 낙동강 유역 소국들의 관문(Gateway)과 같은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었습니다.

문헌 기록뿐만 아니라 출토 유물로 보더라도, 김해 지방에서는 중국에서 가져온 청동거울과 중국 화폐인 오수전(五銖錢) 등이 발견되며, 일본에서 가져온 토기인 하지키와 벽옥제 석촉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즉, 김해의 가락국은 중국의 낙랑군, 대방군으로부터 한반도 각지 및 왜를 연결하는 중개 무역의 중심지였던 것입니다.

납작도끼 납작도끼
덩이쇠 덩이쇠

한편 가야 지역 발전의 또 하나의 원동력은 이 지역에 철산지가 상당히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조선 초기의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김해 감물야촌과 창원 불무산의 사철 생산과 합천 야로의 철광 등을 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도 변한의 철이 한, 예, 왜, 및 중국의 낙랑군과 대방군에 공급할 정도로 유명하였다고 합니다.

창원, 김해, 부산 등지의 대형 목곽묘에서 다량의 판상철부(납작도끼)와 철정(덩이쇠) 등이 출토되는 것은, 그 지역에 존재하는 풍부한 철광자원의 존재와 연결시켜 보아야 합니다. 김해의 가락국은 선진적인 제철 기술을 보유하고 이를 토대로 한 철 생산과 이에 바탕을 둔 대외 교역의 중심지로서 가야연맹의 발전을 선도하였던 것입니다.

전기가야의 해체와 영향

4세기에 가야연맹은 중국 남조, 백제, 가야, 왜를 연결하는 국제 교역망 속에서 활동하였으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신라와 경쟁하였습니다. 반면에 신라는 고구려에게 후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400년에 고구려 광개토왕이 군사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였습니다. 가야연맹의 대표 세력인 임나가라(김해시)는 대규모의 군대를 맞아 대항하지 못하고 갑작스러운 멸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가야사로서는 매우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이것이 한반도 및 동북아시아의 고대사에서 파생되는 영향은 매우 컸습니다.
호태왕명 호우 호태왕명 호우
첫째로, 전기 가야연맹이 해체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결과입니다.

가야 소국들이 모두 망한 것은 아니지만, 성주, 창녕, 부산 등 낙동강 동쪽 지역의 소국들이 신라의 수중에 들어가고 낙동강 하구의 주요 세력들이 초토화되었습니다.

둘째로는 백제가 바다를 통하여 왜와 교역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백제는 5세기 들어 영산강 유역의 세력을 지원하면서 이를 통하여 왜와의 교역을 지속해 나갔다고 보입니다. 신라는 가야와 왜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났으나 고구려의 정치적 간섭에 한동안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셋째로는 가야연맹 내의 후진 지역이었던 경상 내륙 지방과 왜가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야의 문화 중심지였던 낙동강 하구의 주민들이 흩어져 경상 내륙 지방과 일본 열도 등으로 이주하면서, 제철 및 철기 제조 기술, 도질토기 제조기술 등이 전수되었다고 보입니다. 혹자는 가락국의 지배 세력이 일본열도로 집단 이주한 것을 가야의 쇠퇴 원인으로 보기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 열도에는 천황제 정권의 토대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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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08.26 15: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