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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이 시작된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의 농기구는 주로 돌과 나무로 만든 것이 사용되었습니다. 신석기시대에는 어로와 사냥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돌보습, 돌괭이, 돌낫 등의 농기구를 사용하여 조, 피, 수수 등의 작물을 재배하였습니다. 벼농사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청동기시대에는 돌을 정교하게 갈아 만든 돌보습, 돌괭이, 반달돌칼, 돌낫 등의 석제 농기구를 이용하여 논과 밭을 경작하였습니다. 진주 대평리에서는 밭이, 울산 옥현에서는 논이 발굴되어 당시에 논과 밭농사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돌보습과 괭이로 땅을 갈거나 일구고 반달돌칼과 돌낫을 이용하여 곡물을 거두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널리 출토되는 반달돌칼(半月形石刀)은 곡식의 이삭을 따는 데 사용한 수확용구로서 손에 거는 끈을 꿰기 위하여 1~3개의 구멍이 뚫려 있으며 한쪽에 날이 나 있습니다. 이 시기의 목제 농기구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진주 대평리에서는 나무괭이로 밭을 간 흔적이 확인되어 밭의 경작에 목제 농기구도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의 유적에서는 불탄 쌀(炭化米), 콩, 조, 참깨, 수수 등의 곡물이 발견되었습니다.

반달돌칼 돌낫 반달돌칼 돌낫
U자형 삽날 U자형 삽날
M3형 살포 M3형 살포

철기 문화의 도입이 다소 늦은 변한 지역은 기원전후에 가장 선진적인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납작괭이(板狀鐵斧)는 도끼나 괭이로 사용되었는데, 대구 팔달동 90호에서는 벽면에 이것으로 판 흔적이 있어 괭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조괭이는 날 전체가 마모되거나 한쪽으로 경사지게 마모된 것으로 보아 경작용 농기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외날따비(踏鋤)는 몸통의 길이에 비해 폭이 좁게 생긴 형태로서 파종구를 만들고 땅을 가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창원 다호리 1호분에서는 나무자루가 끼워진 것이 발견되어 자세한 용도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전의 수확용구는 이삭을 따는 반달돌칼이나 반달쇠칼이었으나, 쇠낫이 나타나면서 곡물의 줄기까지 수확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전 시기에 이어 목제 농기구도 널리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마한 지역인 광주 신창동과 무안 양장리에서 출토된 나무괭이, 나무쇠스랑, 고무래 등으로 보아 이런 것들은 변한 지역에서도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당시의 주요한 농기구는 따비, 괭이, 낫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따비-괭이농사가 경작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갈이(따비, 괭이)와 걷이(낫)의 과정이 철제 농기구로 수행되고 있었습니다.

3세기 이후 나무덧널무덤(木槨墓)과 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에서는 U자형삽날과 쇠스랑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주로 김해 양동리과 대성동에서 출토되어 금관가야(金官加耶)의 선진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U자형삽날과 쇠스랑은 주로 대형분(大型墳)에서 출토되고, 주조괭이, 쇠낫 등의 농기구는 소형묘(小型墓)에서 발견되었습니다.

4세기 이후에 납작괭이와 외날따비가 사라져가고 호미(鐵鋤)와 살포(鐵·)가 사용되었습니다. 살포는 논에 물꼬를 트거나 막을 때에 사용하는 농기구로서 네모꼴의 몸통에 가늘고 긴 굽통이 평행하게 연결된 농기구입니다. 살포는 경남 합천의 옥전 M3호에서 쇠자루가 달린 채로 발견되어 당시 논농사를 장악하고 통치하는 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쟁기(犁)는 가야지역에서 출토된 예가 없으나 고구려와 신라의 예로 보아 가야에서도 소가 끄는 보습이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철제 농기구는 쟁기·U자형삽날·쇠스랑(갈이)-호미·살포(삶이)-낫(걷이)이라는 완성된 작업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대가야에서는 실용적인 철제 농기구가 보편적으로 출토되지 않았으나 5~6세기 무덤에서 작은 미니어처 형태로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로 대가야권인 고령 지산동·본관동·쾌빈동, 합천 반계제, 함양 백천리, 남원 월산리 등지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이것은 호미, 따비, 괭이, 낫 등 실용적인 농기구의 모양을 축소한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이로 보아 대가야에서도 실생활에서 철제 농기구를 농업 생산에 이용하여 생산력을 증대시켰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살포도 6세기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墓)에서 작은 미니어쳐 형태로 출토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창원 가음정동 3호, 김해 구산동 고분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후 살포는 더 이상 무덤에서 묻히지 않고 조선시대에 임금님이 신하에게 하사한 궤장(·杖)에 그 잔재를 남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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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06.27 13:4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