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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과정에서의 합천

삼국은 4세기를 지나면서부터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중국과의 항쟁속에서 영역을 확장하기도 하고 삼국 상호간의 영역을 확대하기 위한 끊임없는 항쟁을 통하여 발전하여 갔다.

이 시기 합천지역은 가야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가야의 대표세력은 전기에는 김해지역의 가락국(駕洛國〔金管國〕)이었고, 후기에는 고령지역의 가라국(加羅國〔大加耶〕)이었다. 전기가야의 대표세력이었던 가락국은 기원 후 1세기 무렵부터 해상교통의 중심지였고, 철을 바탕으로 활발한 교역을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5세기 초 고구려의 한반도 남부에 대한 정벌이후부터 가락국이 쇠퇴하자, 가야제국은 고령지역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재편되기에 이르렀다.

합천읍 대야성 합천읍 대야성
합천읍 죽죽비 합천읍 죽죽비

이 시기를 후기가야라고 한다. 후기가야는 대략 13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13국 중 합천지역에는 다라국이 있었다. 대가야는 가야 전체를 통해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6세기에 이르러 금관국(532)과 대가야(562)는 신라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금관국과 대가야가 멸망하는 과정 속에서 합천지역도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신라의 남방진출은 밀양, 김해, 양산, 함안, 사천 일대의 남강 이남에로의 방향과 창녕, 초계, 합천, 거창 일대의 남강 이북과 낙동강 이서를 연결하는 방향이었다. 전자는 금관국을 비롯한 안라국에 대한 진출을 말하며, 후자는 대가야에 대한 정복과정이었다. 이때 전자의 방향에 길목이 된 곳은 양산(黃山津) 일대이며, 후자의 요충지는 합천 일대가 되었다.

신라의 대가야 복속과정을 살펴보면, 진흥왕 16년(555)에는 비사벌(창녕)에 완산주(完山州:下州)를, 18년(557)에는 감문주(甘文州:개령)에 사벌주(沙伐州)를 설치하고 대가야를 압박하여, 23년(562)에는 복속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가야지역이 완전히 토벌됨에 따라 26년(565)에는 완산주(하주)를 폐하고 대야주(大耶州)를 설치했다. 대야주는 합비지역에 해당한다.

이렇게 하여 합천은 가야가 신라에 복속되는 과정 속에서 신라의 영역에 포함되고 백제와의 경계지역으로서의 중요성으로 인하여, 신라의 지방통치 체제 속에서 대야주가 설치(565)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백제는 고구려가 수·당과 치열한 전쟁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신라와 끊임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위덕왕(554~598)과 무왕(600~641)때부터 계속된 전쟁은 의자왕(641~660)이 즉위하면서 더욱 격렬해졌다. 대야성 전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진행되었다. 백제는 의자왕이 즉위함에 이르러 어느 시기보다 과감하게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642년에 의자왕 자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의 서쪽을 쳐서 40여 성을 함락시키기도 했다. 이어 장군 윤충(允忠)으로 하여금 신라의 대 백제전의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대야성을 공격하게 하여 함락시켰다.

이상에서 7세기 전반대 한반도 내 삼국의 정황을 살펴본 결과, 백제와 신라간의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합천이 가지고 있는 지역적 중요성은 상당했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합천

문무왕 16년(676)에 이르러 통일전쟁이 완수됨으로써 신라는 확장된 영토와 새로이 복속된 인민을 지배하기 위하여 새로운 지배체제를 구축했다.

통일신라는 신문왕 5년(685), 지방조직을 9주(州) 5소경(小京)으로 정비했다. 9주는 신라·백제·고구려 삼국을 기준으로 각기 그 옛 땅에 3개의 주를 설치한 것이다. 주 밑에는 117개~120개의 군과 293개~305개의 현이 있었다. 5소경은 동서남북중의 방향에 맞추어서 다섯으로 정리되었다. 5소경은 김해·충주·원주·청주·남원 이었다.

합천은 9주중 강주(지금의 진주)에 소속된 강양군이었다. 강양군은『삼국사기』에 “원래 대량(야)주군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합주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이 셋인바 삼기현(三岐縣)은 원래의 삼지현(三支縣: 麻杖이라고도 한다)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르며 팔계현(八谿縣)은 원래의 초팔혜현(草八兮縣)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신번현(新繁縣)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으로 보아 통일신라 시기의 합천은 9주 5소경의 지방통치 체제하에서 9주의 하나인 강주에 소속된 군으로서 3개의 영현을 거느린 지역임을 알 수 있다.

후삼국시대의 합천

후삼국기의 삼국간의 항쟁은 후백제의 견훤과 궁예의 태봉을 이은 고려 태조 왕건과의 대결이었다. 견훤은 왕건의 고려정부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있었으며 호의를 표했다. 그러나 견훤이 신라를 공격할 때 왕건이 신라를 돕는 것을 계기로 후백제와 고려는 적국이 되고 말았다.

한편 견훤은 신라에 대해서는 옛날 백제의 영역을 회복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공략했다. 효공왕 5년(901)에 대야성(합천)을 공격했고, 효공왕 10년(906)에 상주 사벌진에 진출했으며, 다음 해에는 일선군(선산) 이남의 10여 성을 쳐서 빼앗기도 했다. 신덕왕 5년(916)에도 대야성을 공격했고, 경명왕 4년(920)에는 견훤 자신이 스스로 보기 1만 명을 거느리고 다시 대야성을 공격하여 마침내 이를 함락시켰다. 또 진격하여 구사군(창원)을 함락시켰으며, 경애왕 2년(925)에는 거창 등 20여 성을 쳐서 점령했다.

해인사-길상탑 해인사-길상탑
해인사의 고승회랑 조사상 해인사의 고승회랑 조사상

경애왕 4년(927)에는 고울부(영천)를 쳐서 신라의 왕경으로 들어가 경애왕과 귀족, 왕비 등을 죽이고 신라의 재물을 약탈하는 등 신라에 대하여 맹렬한 공격을 감행했다.

920년 견훤이 대야성과 구사군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을 때 왕건은 신라에 원병을 보내어 후백제에 대한 견제 의 의사를 나타내었다. 이로부터 후백제와 고려는 교전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합천은 7세기 통일전쟁의 과정에서도 그러했던 것처럼 지역이 가지고 있는 군사적 요충지로 인하여, 후백제 견훤의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합천은 후백제가 신라의 중심부에 진입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고려는 이 지역을 막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후삼국의 항쟁, 특히 경남 서부일대를 둘러싼 항쟁은 태조 13년(930)의 후백제와의 고창(안동)전투에서 결판나게 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후백제는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며 고려에 의한 통일국가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합천지역은 삼국통일 과정에서처럼 후삼국의 통일과정에서도 군사적 요충지로써 끊임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던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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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박물관 (☎ 055-930-4882)
최종수정일 :
2019.06.27 15:3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