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번역시스템을 이용하여 자동 번역중입니다. 번역이 정확하지 않을 경우가 있습니다.
It is under automatic translation using Google translation system. The result may not be accurate.



경상도의 행정구역변화와 합천

조선의 지방행정 조직은 전국을 8도로 나누어 각각 관찰사(觀察使)를 두고 그 밑에 부(府), 대도호부(大都護府), 목(牧),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을 두어 부윤(府尹), 부사(府使), 목사(牧使), 군수(郡守), 현령(縣領), 현감(縣監) 등의 수령을 파견했다.

합천의 연혁을 각종 지리서에 살펴보면『세종실록지리지』에는 합천군 초계군은 상주목 관할이며, 삼가현은 진주목 관할로 되어 있다.『동국여지승람』에는 합천군, 초계군, 삼가현으로 나타나고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진주부 소속에 합천, 삼가, 초계로 나누어져 있다.

합천향교 합천향교
삼가향교 삼가향교

『경상도지리지』에는 위의 기록 외에 인조 7년(1629), 역옥죄인이 태어난 고을이라 하여 현으로 강등했다가 인조 22년(1644)에 다시 군으로 승격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합천군의 관할 지역으로는 현재의 합천읍·대양면·율곡면·용주면·봉산면·묘산면·야로면·가야면·의령군 부림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계군은『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관할 지역이 현재의 초계면·적중면·청덕면·덕곡면·율곡면 일부이다.

삼가현은 삼기현을 태조 때에 군으로 승격시켰으나 태종이 삼기현과 가수현을 합쳐 삼가로 만들고 현으로 강등했다. 관할 지역은 현 삼가면·쌍백면·가회면·대병면·봉산면 일부·거창군 신원면 등이다.

합천의 지방행정

초계향교 초계향교
지금의 합천지역에 해당하는 행정구역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합천군·초계군·삼가현이었다.
조선시대 지방 행정 구성을 보면 각 지역에는 수령이 파견되었고 이를 보좌하는 행정 실무자인 향리가 있었다. 그리고 지방 향교 학생의 지도를 담당하기 위하여 부와 목에는 교수(敎授), 군과 현에는 훈도(訓導)를 두었다.
또한 군사나 경찰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무관적인 속료 군교(軍校), 사령(使令) 등이 있었다.

이와 별도로 수령의 행정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양반층이 중심이 되어 수령의 자문에 응하고 풍기를 단속하는 향청(鄕廳)이라는 자치기구가 있었는데 별좌(別座), 별감(別監) 등의 임원을 두어 활동을 원활하게 하였다.

영조대의『여지도서(輿地圖書_』와『구합천군지(舊陜川郡誌)』에 기록되어 있는 합천지역의 관직과 임원을 살펴보면 합천군에는 군수 1인, 좌수 1인, 별감 2인, 군관 4인, 인리(人吏) 42인, 통인 27인, 사령 19인, 관노 19인, 주탕비(酒湯婢) 7인, 관비 9인이 있었고, 초계군에는 군수 1인, 좌수 1인, 별감 2인, 군관, 인리 50인, 지인(知印) 21인, 사령 20인, 관노 5인, 관비 4인이 있었으며, 삼가현에는 현감 1인, 좌수 1인, 별감 2인, 향리 5인, 율생(律生) 5인, 가리양정(假吏良丁) 10인, 관노 25인, 주탕비 12인, 관비 10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편 공공기관으로는 합천군에는 객사, 동헌, 향사당(鄕射堂), 호적소, 백화당(百和堂), 군사(郡司) 등이 있었고, 초계군에는 객사, 청심당(淸心堂), 낙민당(樂民堂), 향사당, 군관청, 양무당(養武堂), 인리청(人吏廳), 훈련청(訓練廳) 등이 있었으며, 삼가현에는 객사, 동헌, 향사당, 군관청, 장관청(將官廳), 인리청, 호적소, 전제소(田制所), 통인청, 사령방, 관노방 등이 있었다.

합천의 군사제도

조선의 지방군사 조직은 세조 때에 군사상의 편제를 재정비했다.

『경국대전』에 기록되어 있는 진관체제하의 합천지역을 살펴보면, 합천은 우병영(右兵營: 창원)에 속하는데, 우병영에 속하는 진관은 상주·진주·김해였고, 진주진관 휘하에 동첨절제사로 합천·초계·함양·곤양군수가 있고, 절제도위로 진주판관·남해현령·거창·사천·삼가·의령·하동·산음·안음·단성현감이 있었다. 따라서 합천군수·초계군수는 동첨절제사이고, 삼가현감은 절제도위였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과 합천지역의 의별활동

임진왜란과 경상우도의병(慶尙右道義兵)

의병전투 모형도 초계향교
임진왜란이 시작된 2개월여의 기간은 일본군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하지만 이후로 일본군의 진격은 주춤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을 결정적으로 이끌었던 것은 의병이었다. 특히 경상우도 지역의 의병활동은 다른 지역보다 더욱 강력하고 폭넓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 지역의 의병장들은 합천의 정인홍, 의령의 곽재우, 고령의 김면, 삼가의 윤탁, 박은제, 초계의 김치원, 이대기, 산음의 오장, 단성의 권세춘, 함안의 이정, 진주의 허국주, 금산의 여대로, 창녕의 성천희, 영산의 성안의 등이었다

다른 지역에서 보다 경상우도 지역에서 의병의 활동이 폭넓게 진행되고 있었던 것은 이 지역이 가지고 있었던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인한 것이었다.

  • 첫째로, 사족들이 향촌의 지배질서를 장악하고 있었다. 즉 사림 가운데 명망 있는 자가 창의하여 문하의 호응을 얻은 다음, 그 호응자들이 다시 각기의 노복이나 거주지의 향민들을 동원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의병 중에서 우도의 의병은 난의 전세를 뒤엎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여타 지역에 비하여 그 규모가 컸으며 또한 학파를 중심으로 한 결속력이 상대적으로 강했던 점에 특징이 있었다. 정인홍의 경우는 외가인 진양 강씨의 토착적 기반, 거주지인 합천군 야로의 풍요로운 지리적 환경 등으로 인하여 비교적 탄탄한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에 더하여 남명 조식의 수제자라는 그의 학문적 사상적 지위는 평소부터 지역민들의 존경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 둘째는 경상우도의 자연적 환경이었다. 우도는 좌도에 비하여 토지의 비옥도가 우세했다. 경제력의 풍부함은 많은 노비를 거느리게 하였고 이들을 쉽게 의병으로 전환시킬 수 있었다.
  • 셋째로 남명학파의 사상적 특성이 의병활동을 더욱 진작시켰다. 남명은 ‘경의(敬義)’ 두 자를 사상의 핵심으로 삼고 있었다. 의를 중시하였던 사상경향은 곧 무를 상무(尙武)정신으로 표출되어 경상우도의 남명학파가 초기 의병을 주도할 수 있었던 배경의 하나가 되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요인이 경상우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의병장을 배출하고 조직적이고 강력한 모습을 보여준 원인이 되었다.

합천지역의 의병활동과 정인홍(鄭仁弘)

내암 정인홍선생 교지 내암 정인홍선생 교지
정인홍(1535~1623)은 본관이 충남 서산(瑞山)이며,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來菴)으로서 합천출신이며, 윤(倫)의 아들이었다.
조식의 수제자로서 경상우도의 남명학파를 대표했다.
1592년 5월 8일 김성일이 초유사로 영남에 와서 사인들을 불러 모아 창의할 것을 권했다.
정인홍은 김면과 함께 뜻을 같이하는 사인들을 규합하여 1,600여 인의 의병을 조직했다.
관찰사 김수는 삼가, 초계, 성주, 고령의 군사를 정인홍의 휘하에 배속시켜 주기도 했다.
이때 정인홍 의병의 주요한 군사적 역할은 의령의 곽재우, 거창의 김면, 초계의 김치원, 이대기 등과 고령의 김응성, 성주 일면을 지키는 문려, 이홍우 등의 사이를 왕래하면서 위급한 곳을 지원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즉 경상우도 의병을 총괄하는 지위에 있었다.
정인홍이 의병전투에서 올린 전공은 무계전투(茂溪戰鬪), 초계전투, 안언역(安彦驛)전투, 그리고 진주성부원(赴援)전투 등 4차례의 대전과 성주성전투로 집약될 수 있다.
  • 첫째, 무계전투이다. 왜군은 5월 19일에 낙동강 연안의 주요한 도선(渡船)장을 확보하여 수운(水運)을 엄호하고자 무계를 지키고 있었다. 정인홍군은 고령, 성주의 군과 합세하여 6월 5일에 적을 기습 해 둔량과 보물을 불태우고 적 140여 명을 사살하고, 적장에게도 중상을 입혔으나, 현풍에서 적의 구원병이 들이닥치자 부득이 회군했다(제1차 전투). 7월말에는 다시 성을 포위 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리고 철수했다(제2차 전투).
  • 둘째, 초계전투이다. 6월 말경에 적이 낙동강을 내려온다는 정보를 얻고 강을 따라 공격하여 많은 적을 죽이고 마수원(馬首院)까지 적을 따라가서 8선의 왜적을 모두 죽였다.
  • 셋째, 안언역전투이다. 성주,고령,합천 등 6읍 의병을 이끌고 사원으로 진군하여 우마(牛馬) 140여두, 군량(軍糧), 기계(機械), 짐수레, 화약 등을 빼앗는 전과를 올렸다. 이상의 싸움 이후에 적병은 강으로 통행할 수 없었고 고령, 초계 경내의 적의 분탕이 그치게 되었다.
  • 넷째, 진주성부원전투이다. 제1차 진주성전투(10월 5일~10일)시 진주가 포위되었을 때 정인홍군은 단계로부터 지원하기 위하여 왔다. 군장 김준민과 중위장 정방준 등을 도우러 가는 길에 갑자기 단성의 경계에서 위의 적병을 만나 대전을 치러 타격을 주었다. 도망하는 적을 추격하여 진주성 아래에 이르렀지만 적은 이미 물러났다. 그때 단성은 분탕을 면하였고 적병은 산음을 침범하지 못했다. 진주의 포위가 풀린 것은 모두 이 일전의 공 때문이었다.
  • 다섯째, 성주성전투이다. 8월에 들어서면서 호서, 호남에서 패퇴하던 적들이 모두 영남의 성주와 개령 등지로 모여 들었다. 정인홍과 김면은 성주의 적을 습격하기 위하여 성주의 남쪽 사대촌(沙臺村)에 진을 쳤다. 전라도의 최경회와 임계영도 합세하였다.이듬해 1월 평양의 왜적이 섬멸된 이후 적들은 본격적인 패퇴의 길에 올라 개령, 성주의 적들도 물러나기 시작했다. 1월 15일 밤에 적은 성문을 열고 철수했다. 이에 커다란 저항 없이 성주성을 수복할 수 있었다. 8월이 지나면서 정인홍은 성주에 주둔하여 고령, 합천을 담당하고, 김면은 거창에 거처하면서 지례와 금산을 방어하고, 곽재우는 의령에 진을 쳐 함안과 창녕, 영산의 도강해 오는 적을 방비하게 되었다. 이로써 우도는 안정되어 농작을 할 수 있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임진왜란 당시 합천군 지역은 정인홍을 중심으로 하여 대규모의 의병활동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이와 같은 의병활동으로 왜군을 격퇴해 커다란 공헌을 세울 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경상우도 지역을 왜군의 분탕질로부터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족도 조사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시나요?

평가:
담당자
합천박물관 (☎ 055-930-4882)
최종수정일 :
2019.06.27 16: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