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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면 삼가시장과 쌍백면

3·1운동 당시 서울에 있던 정현상은 독립선언서를 맏형인 정현하에게 전하고 상경했다. 한편 이기복도 이원영 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구하여 왔다. 정연표는 운동을 일원화시키기로 의논한 후 유지들을 모아 의거를 협의했다.
약속한 3월 18일 삼가 시장에서는 오후 5시가 되자 3백~4백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정연표의 선창에 이어 모여든 군중은 숨겨온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친 후 이곳 경찰 주재소를 포위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삼가면사무소 삼가면사무소
오후 8시, 합천 경찰서 경찰들이 이곳 주재소 경찰들과 힘을 합하여 주동인물 정연표 외 수십명을 지목, 검거하고 나머지 군중들을 해산시켰다. 주동인물 6명을 구금하고 그 외는 방면했다.
삼가시장 의거 5일 후인 3월 23일 다시 쌍백면 내에서 일어났다. 이곳에 사는 육순의 노인인 공사겸은 정원규·진택현·오영근·정치규 등과 더불어 약 4천명의 군중들을 대동하여 쌍백면 사무소 부근 일대를 누비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의거에 참가했던 쌍백면 서기 최영기와 변용규는 쌍백면 사무소에 방화하여 사옥과 서류를 불태웠다.

그 후 이들 4천명의 군중은 약 10리 떨어진 삼가읍 시장으로 몰려가던 도중 2본의 전주를 파괴하여 통신을 차단하고 삼가읍 시장에서 가회면민과 더불어 크게 활약했다. 노인 공사겸은 이날 삼가읍 시장 의거에서 순국했다. 이곳 의거의 주동인물로 검거된 정연표는 1년 6개월형을, 정각규는 6개월형을, 공민호는 6개월형을 받아 각각 서울 또는 대구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합천읍

고종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한 강홍렬은 서울 3·1의거에 참가한 다음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합천 전군에 전달했다. 이에 합천의 유지 주경천은 대양면 대목리 심재기·심진환·심재인 등 12동지와 거사일을 3월 19일 합천읍 장날로 약속하였다.

합천읍 3.1운동 기념탑 합천읍 3.1운동 기념탑

3월 19일 주동인물들은 합천읍으로 잠입 해 오후 4시 장꾼이 가장 많이 모여들었을 때 장 복판에서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주고 소리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약 5백 명의 군중이 일제히 여기에 호응했다. 이때 일본경찰들이 출동하여 심재기 외 16명을 검거하고 남은 군중은 해산시켰다.

다음날인 3월 20일, 대양면민은 마정마을로 모여 읍내로 진입하여 각 면으로부터 참가한 군중과 합세하였다. 이 때 손득룡·이용선·김영기·추용만·이상우·배상룡 외 5명이 자진하여 결사대를 만들었다.

오후 7시, 약 4백~5백명의 군중은 경찰서로 몰려가 경찰서를 포위하고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경찰의 해산 종용에 맞서 심재기 등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물리적 충돌로 인해 일본경찰이 일제히 발포하여 김영기 등 4명이 즉사하고 11명이 부상을 입었다. 군중들이 피하여 해산하자 이들은 주동인물을 검거 하였다.

이때 피살된 순국자는 김영기·추용만·김호수·강시만 등 4명이고, 부상자는 이용선·손득룡·심재기 외 8명이었으며, 의거의 주동인물로 검거된 심맹권·손득룡·이용선·이용수·배상기·강상무 등은 각각 2년형을 언도받고, 주경천 외 15명은 각각 1주일의 구류처분을 받았다.

대병면 창리

대병면 장단리에 사는 정태섭은 독립선언서 5백매를 가져와 합천군내 각면에 배부하여 민중들을 독립의거로 궐기케 하는데 공헌했다. 3월 초순 이곳 대병면에 사는 임상종도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임상종은 곧 지방 유지를 초청하여 독립선언서를 보이고 거사를 협의했다. 이에 따라 권영두·권중박·정시권·류인수·권양희·송헌기 등은 거사일을 3월 20일 창리 장날로 약속 했다.

이들은 역평리에서 선언서를 등사하고 크고 작은 태극기를 만드는 한편 각 마을을 순방하면서 대중 동원을 위한 작업을 서둘렀다.

3월 20일 창리 장날 오후 1시, 장에 모인 군중은 약 4천명이 되었다. 권영두의 연설에 이어 선언서·태극기가 배부되고 큰 태극기를 높이 세운 가운데 주동인물들의 선창에 따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중시위대는 시장을 누비면서 독립만세를 외친 후 창리 경찰 주재소로 몰려가 포위하고 주재소 내로 돌입해 일인 경찰부장과 경찰을 때려눕힌 후 주재소 건물 기구 전부를 파괴하고 문서류를 소각해 버렸다. 군중은 다시 주재소로부터 100미터 떨어진 대병면 사무소로 달려가 그곳 건물 기구를 파괴한 후 서류·장부책 전부를 소각했다.

이와 같이 독립시위가 절정에 도달했었을 때, 자동차로 달려온 수십명의 일본군이 총을 난사하고 칼을 휘둘렀다. 이에 군중은 해산하고 54명이 검거되었다. 이들 가운데 권영두·임상종·권중박·송헌기·류인수는 각각 1년 6개월~3년형을 언도 받아 진주와 대구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주동인물 가운데 정시권과 권양희는 이때 종적을 감추어 옥고를 면했다.

초계면 초계리

초계면 무릉리에 사는 유지 이원화·김하선·성만영·김덕명 등은 의거를 단행할 것을 모의하여 거사일을 3월 21일 초계리 시장 장날로 약정하고 동지를 규합하였다.
3월 21일 장날,오후 1시가 되자 장꾼은 약 4천명으로 불어났다. 주동인물 이원화·전하선·성만영·김덕명·구재범·권국서 등은 준비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 준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고 군중들은 일제히 호응하여 시장을 누비면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초계시장 초계시장
3월 19일 주동인물들은 합천읍으로 잠입 해 오후 4시 장꾼이 가장 많이 모여들었을 때 장 복판에서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주고 소리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약 5백 명의 군중이 일제히 여기에 호응했다. 이때 일본경찰들이 출동하여 심재기 외 16명을 검거하고 남은 군중은 해산시켰다.
다음날인 3월 20일, 대양면민은 마정마을로 모여 읍내로 진입하여 각 면으로부터 참가한 군중과 합세하였다. 이 때 손득룡·이용선·김영기·추용만·이상우·배상룡 외 5명이 자진하여 결사대를 만들었다.

한편 군중들은 탄압세력인 일본군과의 연락을 염려하여 약 3백 명의 청년 주동대원은 초계 우편소를 습격하여 건물과 기물을 완전 파괴한 후 초계 주재소로 몰려갔다. 이들은 주재소를 포위하여 투석과 곤봉으로 유리창 등을 파괴했다. 경찰이 위협 공포를 발사했지만, 군중은 물러서지 않고 일본경찰 2명을 때려눕혀 중상을 입혔다.

이러한 때, 합천경찰서로부터 일본군경이 급파되어 이 곳 일본경찰과 합세하여 총을 발사하면서 군중 속을 뛰어들어 총검을 휘둘렀다. 이때 김장배 외 1명은 적탄에 명중하여 현장에서 쓰러져 순국하고, 군중을 지휘하던 이원탁은 다리에 총탄을 맞아 종신 불구가 되었다. 그리고 권국서는 일 헌병의 총검에 중자상을 입었다. 이 외 군중 가운데 8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와 같은 일본군경들의 총격으로 군중은 오후 4시 해산했다.

초계리 의거에서 피살된 순국자는 김장배 외 1인으로 2명이었고, 부상자는 이원탁·권국서 외 8인으로 10명이었으며, 한편 이 의거에서 검거된 주동인물 이원화·성만영·구재범·김덕명·정수조·정점시·정판백·안주백·권국서·이만용은 각각 1년~3년의 형을 언도받아 대구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김하선과 변영권은 처음부터 의거 모의에 참여했으나 의거 후 종적을 감추어 옥고를 면했다.

묘산면

묘산면 팔심리에는 윤병석·윤병양 등이 거사를 계획하였다. 3월 22일 약속한 거사일이 되자, 이날 도옥리 마을민도 합세하여 오전 11시 1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독립만세를 외치며 묘산면 사무소로 몰려갔다. 이때 신원순·성경술은 일본군경과의 연락을 끊기 위해 연도의 전신주를 절단했다.

헌병대와 경관들이 시위 군중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시위대열은 해산되고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순국자는 윤병하·윤병교 2명이었다.

이곳 의거는 23일에도 일어났다. 한편 검거된 주동인물 신원순은 2년형을, 윤병석은 1년 6개월형을 받아 대구 형무소에 투옥되고, 윤병단·윤병양은 각각 6개월형을 받고 부산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장덕균·한용흥·이우필 3인은 1개월 여의 고문으로 빈사상태가 되자 비로소 방면되었다.

가회·쌍백·삼가 면민의 삼가 의거

김상준과 윤규현은 고종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서울 3·1운동에 참가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윤규현은 그로부터 거사를 단행하기 위해 평소의 친구인 한필동·허동규·한식동·윤구현·허장 등과 더불어 각 면의 동지를 규합하여 면내 각 동리의 대중 동원의 공작 벌렸다. 이러한 때 공작 교섭의 선두에 서서 활약한 사람이 김홍석·정현하·윤사언이었다.

3월 23일 쌍백면에서 약 4천명의 군중이 봉기하여 그 곳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여 면사무소를 불태운 후 통신을 차단하기 위해 전주 2본을 절단하면서 약 10리 되는 삼가 시장으로 몰려갔다. 한편 가회 생비량면 등 연락을 받은 각지 군중들은 속속 몰려와 군중은 1만 2,3천 명에 달했다.

오후 3시, 삼가읍 광장에서 김 전의(典醫:이름미상)·정방철·김달희·임종봉 등이 일제의 침략상을 규탄하고 민족독립의 쟁취를 역설했다. 이 때 일본헌병과 경찰들이 강연장을 포위하고 있었다. 임종봉의 강연이 절정에 달했을 때 일 헌병은 그에게 총격을 가해 대퇴부를 맞혔다. 이를 본 군중들이 일본군경에게 달려가자 이들은 이곳 경찰 주재소로 달아났다. 군중들은 곤봉과 낫을 들고 경찰 주재소와 우편소로 몰려갔다. 일본군경은 일제히 이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군중 13명이 현장에 쓰러져 즉사하고 30여명이 부상으로 넘어졌다. 군중은 해산하였다.

이곳 의거에서 윤성·배숙원·권영규·이상현·박선칠·공사겸·이낙현 외 6명 등 13명이 순국하였고, 김주익·임종봉 외 28명 등 약 30명이 부상했다. 한편 검거된 주동 인물 가운데 김태현은 3년형을 받고, 허동규·윤규현·허정모·최용락·한필동은 각각 8개월형을, 오영근·권중태·진택현·정원규·정치옥 등도 6개월 이상의 형을 언도받아 이들은 모두 진주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야로면 야로시장

현 야로시장 현 야로시장
야로면 정태리에 사는 박남권은 면내 유지들과 모의를 거듭하면서 거사를 3월 28일 장날에 단행하기로 하였다.
이날 오후 3시, 장꾼이 가장 많이 모여들었을 때 박남권은 준비해 온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준 후 문창성으로 하여금 ‘대한제국 독립만세’라고 쓴 기치를 장 복판에 높이 들게 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장에 모인 군중들은 일제히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을 누빌 때 일 헌병이 출동하여 총검으로 해산시켰다. 주동인물 박남권·문창성은 혹독한 고문을 받은 후 5월 28일 대구법원으로부터 박남권은 1년형을 언도 받아 대구 형무소에 투옥되고 문창성은 태형 90을 언도 받았다.

해인사의 학생독립운동

3·1 운동 당시의 해인사 주지 이회광은 친일파로서 해인사 승려들로부터 반감을 사고 있었고 일제는 해인사의 위험성을 감안하여 경찰 주재소를 이곳에 설치하고 경비전화까지 가설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이곳 해인사 학생들에게도 곧 중앙의 불교계 루트를 통해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다.

해인사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학생대표 30명은 독립운동 방안을 토의 하여 지역별로 분담하여 3인씩 대를 조직하고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졌다.

강재호·김봉률·기상섭 1대는 경주·양산·통도사·범어사·동래·부산·김해 지역에서 활동했다.

한편 송복만·송복룡·최범술 1대는 합천·삼가·초계·의령·진주·사천·곤양·하동 일대를 책임 맡아 지방의 운동가들과 함께 활약했다.

합천역사실 3.1운동 합천역사실 3.1운동
또한 박달준·박덕윤·이덕진·김장윤 일대는 거창·안의·함양·산청·남원 등지를 맡아 가던 중 일 헌병대와 수비대에 검거되었다.
이외 공주 일대의 사찰, 법주사 근방의 충청도, 상주에서 달성까지의 경북 일대, 화엄사·송광사·선암사 등의 전남일대 에서 활약했다. 이들은 대개 당시 삼엄한 경계 아래 서로가 긴밀한 연락을 취하지 못하고 각기 활약하다가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 중 김재호·송복만·김봉률·손덕주·박덕윤·김장윤 등 10여 명은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후 독립군에 편성되어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그 가운데 김봉률·박덕윤·김장윤 등은 군자금 조달차 문경 김룡사로 잠입하다가 주지의 배반으로 검거되어 2년형의 언도를 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31년 3월 불교 비밀결사 만당(卍黨)이 결성 되어 김법린·허영호·박영희 등 18인은 한용운 아래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당시 해인사 주지였던 변설호의 밀고로 임환경·최범술 등 30명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고, 이고경은 옥사했다. 그 뒤 최범술·김범부·김법린은 해인사·다솔사 등에서 강원생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또 조선어 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흥원·함흥 등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상술한 일반적인 활동과 아울러 3·1운동 당시 해인사를 중심으로 직접적인 만세운동도 일으켰다. 황해도 해주군 출신으로 당시 해인사 부속 지방학림 학생인 홍태현은 그곳 학생인 백성원·김경환·김성구등과 더불어 의거의 모의를 하여 3월 31일 밤 11시경에 봉기했다.

이날 오전 11시경 해인사 홍하문 밖에 약 2백명의 학생들이 모여 먼저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어 시위를 전개한 후 이날 1시 해인사 주재소로 몰려갔다가 이곳 경찰들이 총을 발사하여 일단 해산했으나, 그날 밤 11시경 약 2백명의 군중이 다시 봉기하여 해인사 앞 도로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자 학생들은 이들과 합류하여 독립만세를 전개했다.

그러나 곧 일경들에 의해 강제해산을 당하고 말았다. 홍태현은 다른 주동 인물과 같이 검거되어 6월 11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6개월형을 언도 받았다.

가야면 매안리

가야면 청현리에 사는 한갑개는 동지 박노상과 더불어 가야면 매안리에서 일대의 군중을 규합하여 의거하기로 모의한 후 거사일을 4월 3일로 약속했다.

4월 3일 오후 5시, 한갑개·박노상은 가야면 청현리 박내문의 집에서 독립기 등 기치를 만든 후, 군중들을 모았다. 이에 권덕순 등 수십명이 매안리로 달려왔다. 오후 9시, 주동인물들은 ‘독립기’를 세운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다. 모인 군중들은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이어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한 후 이날은 일단 해산했다.

4월 4일에는 각처의 군중들이 연락을 받아 밤에는 약 4백명이 가야산성에 모이게 되었다. 이들은 산상에서 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친 후 면사무소로 몰려갔다. 이때 주재소 경찰들이 긴급 출동하여 이들에게 총격을 가했기 때문에 군중들은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주동인물로 검거된 한갑개는 혹독한 고문을 받은 후 5월 27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으로부터 4개월을 언도받고 대구 형무소로 투옥되었다.

기타 지역

4월 7일, 봉산면 술곡리에서도 만세운동이 있었지만, 전하는 사료가 없어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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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06.28 10:3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