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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작성일
작성자
관광진흥과
조회수:
3866
이 스토리텔링은 경상남도 합천군 문화관광해설사로 근무하시는
 손홍배 선생님이 작성한 " 혼이 되어서도 왜적에 대한 분노를 잊지 않은 사명대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  조선에는 무엇이 보배이며 보물인가?
#  우리는 군자의 나라라서 도덕을 높이 숭상하고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베와 곡식을 중히 여기고 금은주옥을 좋아하지
   않으니 보배가 없다.
*  그래도 모두가 갖기를 원하는 귀한 것이 있을 것 아닌가?
#  그렇다. 그것은 일본에는 있고 우리나라에는 없다.
*  그것이 무엇인가? 왜 일본에 있는가?
#  장군! 당신의 머리다. 우리나라에서는 당신의 머리에 천금을 
   걸고 베어오길 원하니 어찌 보배가 아니겠는가.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사명대사의 대담 일부입니다. 얼마나 대담
하고 당당한 배포가 입니까? 
  
사명대사께서는 1544년 밀양 풍천임씨 수성의 아들로 태어나서 13세 때에 황여헌에게
맹자를 수학했으며 1558년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 다시 아버지가 별세하자 김천 직지사로
들어가서 신묵대사의 제자가 되고 1561년 선과에 합격. 직지사 주지로 있었으며 후일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첫 대면에서
#  대사님! 지금 제 손엔 참새 한 마리가 있습니다. 
   이 새는 죽을까요? 살까요?
*  대사! 지금 내 한발은 법당에 있고 다른 한발은 밖에 있는데
   나는 들어갈까요? 나갈까요?

최초의 대화였지만 승려가 살생을 하지 않을 거라는 것과 손님이
왔으니 밖으로 나올 거라는 것을 서로가 이미 알고 있는 대화의
내용입니다. 바늘국수, 구름비, 계란 쌓기 등의 서로의 도술을 나눈 뒤에 드디어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자 금강산에서 머물던 사명대사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전쟁에 나서면 승려로서 살생을 하지않을 수가 없고 나라를 버릴 수도 없는 고민이었죠. 
드디어 “나라가 우선이다” 란 결심이서자 2,000명의 승병을 모아 평안도 순안으로 가서
서산대사와 합류하여 평양성과중화사이로 쳐들어오는 왜군을 막았으며, 이듬해 명나라 
군사와 힘을 합쳐 평양성을 되찾게 되고 그해3월 삼각산, 노원평, 우관동에서도 왜군을 
크게 물리쳐 그 공으로 선교양종판사에 오르고 그 뒤 네 차례나 일본군 진영에 들어가서 
적장 가토 기요마사와 회담 하였습니다.
 
의령전투 등에도 참가하여 대장경을 지키게 되었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명나라 장수 마귀와 함께 울산의 도산과 순천 예교에서도 왜군을 물리쳤다. 
1602년 중추부동지사에 오른 사명대사는 1604년2월 국서를 지참하고 강화 조약을 위한 
사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  허허허! 대사! 우리가 이겼소. 두 폭의 병풍은 외우지 못했소이다.
#  무슨 말씀을! 난 분명히 펼쳐진 병풍내용을 외운다고 하였소.

10리에다 병풍을 펼쳐 놓고 말을 타고 달린 후에 글을 외우는 내기를 했는데 바람에 두 폭이
겹쳐져 있는 것을 확인한 도쿠가와는 황망히 자리를 뜨고 숙소로 인도되어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철커덩 쇠문이 닫히고 밖에서는 밤을 새워 불을 지폈지만 이튿날 문을 열고 보니 
수염에 고드름이 달린 사명대사는 “추우니 불을 더 때라”  아! 사무이 데스!!!

#  내기에서 내가 이겼으니 약속대로 人皮100枚와 辜丸닷 되씩  을 매년 바치라고 한다면
승려인내가 살생을 너무 많이 해서 안  되겠고 대신 전란 중에 잡혀간 조선인 포로를 모두 
데려가야 겠  소이다.
*  으음! 할 수 없소. 그럼 3,000명만 데려가시오.

1605년 4월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아울러 포로3,000명을 데리고 돌아온 사명대사는 
6월에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을 찾아 서산대사의 영전에 절하고 해인사로 돌아오게 됩니다.

광해군으로 부터 자통홍제존자의 시호를 하사받고 홍제암에 머물다 1610년(광해2년) 8월26일 
속세 나이 67세로 입적하였습니다.

1612년(광해4년)에 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석장비(보물1300호)를 건립하였는데 석장비문은
홍길동전으로 더욱 알려진 석학 허균이 지은 것으로 문장도 빼어날뿐더러 대사의 행장이 비교적 
소상하게 적혀있어서 사적으로서의 값어치도 높았다. 

문도들이 화장해서 맑은 구슬 1구를 얻었는데
석종부도(보물1301)를 만들어 그 안에 간직하였다고 기록으로 전하여 집니다.
 
1933년 해인사 제8대 주지였던 이고경 스님이 주지를 마친 후 
1936년 이래 두 번이나 주지선출을 하였으나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지 못하여 공석으로 있던 중 
난데없이 해인사와는 전혀 무관한 친일파 변설호가 주지로 선출 되었다. 

1937년8월 용산 주둔 조선군 사령부에 전사한 일본군 위령제를 지내주고 일본군 승리를 기원하는 
기원제를 지내주며 신도들로부터 국방헌금과 위문금품을 걷어주고 하던 대가였지요. 

변설호는 주지취임 인가를받은 후 1943년 항일운동을 했던 스님들을 밀고하여 이고경 스님은 
고문후유증으로 보석 3일 만에 입적하기도한 해인사 사건의 주모자였는데 그 와중에서도 
당시 합천경찰서장이었던 다케우라에게 홍제암석장비문중에 사명대사와 왜장 가토와의 
대담내용이 있는 비문을 부숴버릴 것을 권유하여 마침내 변설호는 경찰과 석수를 동원하여
석장비를 네 동강으로 낸 다음 한 조각은 해인사내의 경찰주재소 정문 디딤돌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구광루와 명월당 앞에 방치하였습니다.

후일 친일행위를 했던 변설호는 해방 이듬해 반민족행위자로 승권이 박탈되고 1949년 반민특위
경남지부에 체포되어서 옥살이를 하였고 다케우라는 석장비 파손을 지시하고 돌아가던 중 
자동차 전복사고로 현장에서 즉사 하였다고 합니다.

임환경(1887~1983) 스님이 주지로 취임한 후 석장비를 대신하여
사명대사비를 새로 건립하였고 그 뒤 1958년 해인사 학인스님들이 발의하여 
석장비를 다시 접합하였는데 깨어진 부분의 글자가
없어서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 후 석장비의 깨어진 틈새에서 나라에 큰일이 일어날 때마다 밀양의 표충사 비처럼 반드시
눈물이 흘렀다고 하여 지금도 이곳을 찾는 많은 이 들이 손바닥으로 쓰다듬어 보기도 합니다.

다케우라 네 이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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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진흥과 관광마케팅담당 (☎ 055-930-4667)
최종수정일 :
2019.05.03 14:3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