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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충신 죽죽과 대야성

작성일
작성자
관광진흥과
조회수:
3086
이 스토리텔링은 경상남도 합천군 문화관광해설사 김숙희 선생님이
만든 이야기입니다

대야성은 진흥왕 23년(562) 신라의 장군 이사부가 이곳을 요새로 삼고 도독을 두어 
다스리게 한 곳이다 .그 당시 도독은 김품석으로 후일 무열왕이된 김춘추의 사위이기도 하다. 

대야성은 백제와 접경지대인 신라 서부의 군사 요충지로서 삼국간의 항쟁이 격화되던
7세기에는 신라의 대 백제방어에서 최전선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선덕여왕 11년(642)에 백제 의자왕이 장군 윤충을 보내 대야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 대야성 성주였던 도독 김품석에게 그의 부인을 빼앗겼던 사지 검일이 성주에게
앙심을 품고 백제로 도망간 모척과 내통하여 성안의 창고에 불을 질렀다. 
이로 인하여 대야성은 큰 혼란에 빠졌고 전의를 잃은 신라군은 패색이 단번에 짙어졌다. 

이에 품석의 한 막료가 성 위로 올라가서
 "만약장군이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면 항복하겠다." 라고 
고함을 지르니 윤충이 즉시 이를 수락했다. 
또한 품석은 보좌관이던 아찬 서천을 파견하여 항복하기를 자청하였다. 

다른 보좌관인 죽죽이 백제의 흉계를 역설하며 만류하였으나 품석은 듣지 않고 성문을 열어 
군사들을 성밖으로 나가게 하였다 
그러나 백제 측의 복병으로 군사들이 다 죽게 되자 그제서야 품석은 죽죽의 말이 옳았음을
깨달았으나 때는 이미 늦었고 급기야 
처자들을 먼저 죽인 다음 스스로 목숨을 끓어 버렸다.

죽죽은 대야성에 남은 군사를 수습한 다음 응전의 채비를 갖추었다. 
이때 사지 용석이 죽죽 에게 
"이미 기울어져 도저히 이길 수 없다, 우선 항복하고 후일을 기약하도록 하자".라고 말했다
죽죽은 "그대의 말도 일리는 있으나 아버지가 나를 죽죽이라 이름 지은 것은 추운 때에도
시들지 않고 꺾일지언정 굽히지는 말라 함이다, 어찌 죽음을 두려워 항복하리오. "

하며 이를 거절하고 끝까지 용전분투하다가 대야성의 함락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때 사지 용석도 같이 전사하였다.

신라 선덕여왕은 그의 용맹성과 위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죽은 후에 급찬으로 추증하여 
그의 뜻 을 기렸다.

대야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 죽죽과 용석의 충의의 정신은 신라군에게 큰 자극이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김춘추와 김유신은 합심하여 화랑정신을 바탕으로 삼국통일의 대업을 성취하게 
된 것이다.

이에 조선 인조22년(1644) 군수 조희인이 옛 격전지인 대야성 입구에 죽죽장군의 얼을 깊이
심고자 "신라충신죽죽지비"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한사 강대수가 지었다 .

<비문>
<여기 이 고장의 젊은이들에게 끝없는 용기와 긍지를 심어 주신 이가 계시니 그 이름 
죽죽이로다. 죽죽은 이 고장 출신 화랑으로서 신라 선덕여왕 때 사지라는 벼슬을 지내며
대야성주 김품석 밑에서 성을 지키게 되었다. 선덕여왕11년(서기642) 8월 백제 장군 윤충이
대군을 이끌고 대야성을 쳐들어 왔을 때 성주 김품석은 주색에 빠져 정사를 외면하고 
있었으며 부하 가운데는 적과 내통하는 무리가 있어 성은 함락 직전에 놓여 있었다. 
이에 젊은 용사 죽죽은 전우 용석과 함께 성문을 굳게 닫고 남은 병사를 이끌고 용감히 
싸웠으나 끝내 성은 함락되고 두 화랑의 선혈은 대야성을 붉게 물들였다. 이 슬픈 소식을 듣고
선덕여왕과 김품석의 장인 김춘추는 백제 정벌의 비장한 결의를 다짐하게 되었으며 이에 
힘입은 신라 화랑들의 궐기는 훗날 삼국통일을 이룩하게 하였으니 신라 충신 죽죽의 장엄한 
전사야말로 통일신라의 채찍으로서 청사에 기리 빛나리라>

또한 황우산, 취적산과 황강을 끼고 황소가 엎드려 황강 물을 마시고 있는 머리위에 법당을 
세움으로써 황우산 연호사라고 불리는 사찰이 자리 잡고 있다.
연호사는 합천 해인사보다 159년 앞서 세운사찰로서 군사의 요충지였던 황우산 대야성에서
전사한 김춘추의 딸 고다소랑과 신라 장병 2천명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와우선사께서 창건한 원찰이다. 
또한 죽죽로를 따라 대야성 주변에는 푸르름이 젖어드는 곳이라 하여 이름 지어진 함벽루가
(고려 충숙왕) 있는데, 누각의 처마 빗물을 황강으로 바로 떨어지고 있어 옛 풍유를 자랑하고 있다. 
함벽루(진주 촉성루)는 대동강의 부벽루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3대 누정의 하나로 꼽고 경관이 매우 
아름답기로 유명한 누정이다.
 
고려문신 안진은 강양으로 가는 도중 한 누를 바라보니 처마와 기둥이 춤추듯 하고 
단청이 현란하여 봉鳳이 하늘을 나는 것 같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남명 조식, 퇴계 이황, 우암 송시열, 영남사림 중 널리 알려진 명유들이 찿아와 
아름다운 주변경관에 몰입되어 시흥과 여가를 즐겼던 이름난 누정이다. 
앞 절벽의 바위에는 함벽루라는 이름의 송시열 선생의 글씨와 함벽루라는 
현판의 글씨는 남명 조식선생의 글씨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연호사 옆 취적산, 대야성에는 많은 비석들이 즐비한데 합천군수 이증영 유애비가 눈길을 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367호로 지정된 유애비는 남명 선생이 짖고 고산 황기로가 썼으며
합천군수를 역임했던 이증영이 극심한 흉년에 백성을 구휼하고 청렴하게 관직 생활을 했던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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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진흥과 관광마케팅담당 (☎ 055-930-4667)
최종수정일 :
2019.05.03 14:3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