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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사지와 황매산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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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진흥과
조회수:
3189
 이 스토리텔링은 경상남도 합천군 문화관광해설사 정순한 선생님이
만든 영암사지와 황매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반갑습니다.
합천에 오시느라고 많이 힘드셨죠? 저는 오늘 여러분들을 모시고 이 곳 영암사지에서 이미 
언제인지 모르게 사라져 버린 영암사의 흔적들을 같이 살펴 보겠습니다
우선, 영암사지의 풍광이 잘 드러나는 저쪽 언덕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영암사를  품고 있는 
황매산과 그 안의 모산재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황매산은 경남 합천군에 있는 높이 해발1,108미터의 소백산맥에 속하는 고봉이랍니다. 
영남의 소금강으로 불리구요, 700~900미터의 고위 평탄면위에 높이 300미터의 뭉툭한 
봉우리를 얹어 놓은 듯한 모습이랍니다. 주 봉우리는 크게 하봉, 중봉, 상봉으로 나뉘고 
합천호의 푸른 물에 하봉, 중봉, 상봉의 산 그림자가 잠기면 마치 세 송이 매화꽃이 물에 잠긴 것 
같다고 해서 ‘수중매’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산이랍니다.

이런 황매산을 모 산으로 삼라만상을 전시 해 놓은 듯한 모산재(해발767미터)는 합천8경중 
제8경으로 잣골듬 이라고도 부르고요, ‘신령스런 바위산’이란 뜻의 영암산으로 불리기도 한답니다. 
바위산에 산이나 봉이 아닌 ‘높은 산의 고개’라는 뜻의 재라는 글자가 붙은 것이 특이한데 
모산재의 옆과 뒤에 여러 개의 고개가 있고 또 재와 재를 잇는 길 가운데 산이 위치한 탓에 
산보다는 재로 인식된 것이라는 설이 있는 바위산이 절경이랍니다. 북서쪽 능선을 타고 펼쳐지는
 황매평전의 철쭉군락은 봄이 오면 온 산이 붉은 이불을 덮고 있는 듯한 느낌이랍니다.

산 북동쪽에는 바위 끝부분이 갈라진 커다란 순결바위가 있는데 평소 사생활이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 이 바위틈에 들어가면 빠져 나오지 못한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또 넓은 암릉 끝에 돛대처럼 우뚝 솟아 있는 돛대바위가 있고, 정상에는 한국제일의 명당자리로 
알려진 무지개 터와 조선의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이성계의 건국을 위해 불심으로 지성을 드렸다고 
전해지는 국사당과 황매산성 등이 볼 만한 곳으로 꼽힙니다. 

황매산 정상에 서면 잔잔한 합천호와 이웃한 악견, 금성, 허굴3산과 산청군 차황면 쪽의 산과 
들이 한눈에 보인답니다. 이렇게 수려한 경관에도 불구하고 황매산은 가야산과 해인사의 명성에 
가려져 그동안 찾는 사람이 적었답니다. 
황매산은 1983년에 ‘합천 황매산군립공원’으로 지정 되었고요, 황매산 남쪽기슭 모산 재 아래에 
영암사지가 자리 잡고 있답니다.
 
“세상의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영암사지를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고 
장옥관 시인님이 너스레를 떨었는데요, 저 역시 그분의 너스레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음을 
믿는 것은 이곳의 풍광은 이곳을 찾는 사람만이 알 따름이라 믿기 때문이랍니다. 
여러분들이 느끼기에 영암사지의 뒷산 풍광이 어떠세요? 그렇습니다. 영암사지와 그 주변의
빼어난 풍광에 비해 카메라의 기능이 결코 인간의 눈에 따라 올 수 없는 하찮은 수준에 불과 할 
뿐이라는 사실도 이곳에서 깨닫게 된답니다.

자. 이제 영암사지로 들어서도록 하겠습니다.
영암사지는 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로 면적은 약 3,800제곱미터의 
상당한 규모의 가람 터로서 사적 제131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큰 규모의 절이 안타깝게도 창건연대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차차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왼쪽에 보이는 축대 위에 서있는 
느티나무 보호수가 보이시죠? 
이 보호수는 수고가 30미터구요, 수령이 600년이나 되었답니다.
 
영암사지에 들어서니 높은 석축이 우리들을 먼저 반깁니다. 
석주기단 부분 중간에 툭 튀어나온 쐐기돌들을 보십시오. 돌못을 박아 정성들여 쌓은 
웅장한 돌 축대는 신라의 빼어난 석축기술을 살펴볼 수 있는 유물이 되겠습니다. 
영암사지는 사적비나 문헌에 구체적으로 전하는 바가 없고요, 
다만 지금은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부서진 파편으로 보관되고 있는 강원도 양양의
‘선림원지홍각선사탑비’(보물 제446호인 귀부 외 이수는 현지에 남아있음)의 비문에 
영암사에 대한 기록이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유일한 것입니다. 
‘사림사홍각선사비’ 조각에 새겨진 글자에 ‘영암사수정누월’이라고 기록 된 것과 고려 때인 
1014년에 적연선사가 83세로 입적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그 이전에 세워졌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을 따름이죠.

그럼 먼저, 금당 터를 올라가보도록 하겠습니다.
1984년 동아대 박물관에서 절터의 일부를 발굴, 조사하여 사찰의 규모를 부분적으로 
밝히게 되었는데요, 조사된 건물터로는 불상을 모셨던 금당, 서 금당, 회랑, 요사채 등이 
확인되어 당시의 가람의 규모를 파악하게 되었답니다. 
그 규모로 보아서는 신라하대 당시에 양양 선림원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영남지방 
유수의 선찰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것에 반할만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할 때 태조는 이에 대한 답례로 신라의 왕실과 결혼하여
친밀함을 오래가고자 뜻을 전하고 이에 경순왕은 백부 김억렴의 딸을 고려로 시집보냅니다. 
당시 김억렴은 합천에서 세력권을 가진 인물이며 또한 곳곳에서는 호족의 힘이 컸던 시대였기에
 김억렴은 합천(당시 강양군)의 호족으로 영암사의 창건과도 무방하지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영암사지의 건립주체가 9세기 신라말기 합천지역 호족의 발원으로 지어진 원찰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후 김억렴의 딸은 신성왕후가 되고 신성왕후 김씨의 소생인 왕욱이 경종의 왕후 황보씨와 
정을 통해 낳은 아들이 현종이랍니다. 현종으로 인해 할머니의 출생지인 합천이 합주가 되고 
몇 년 후에는 12현을 거느린 경남서부의 행정중심지가 되었답니다. 

이는 합천의 향교가 다섯 곳이나 되는 것과 결코 무관하지가 않답니다. 
이러한 연유로 현종 이후에 사찰의 규모가 커졌고 신성왕후 김씨와 현종 부친, 
모친 황보씨의 명복을 빌고 천도재를 지내던 왕실 원찰의 기능을 가졌을 꺼라 추정 해 볼 수 있답니다. 
영암사의 높은 축대와 회랑터가 이를 뒷받침해주고 쌍사자석등, 기단의 조각, 통 계단, 
동금당의 두 귀부 등 곳곳이 평범하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호족과의 연관과 
함께 왕실과의 연관을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원래의 영암사였을 때는 탑, 석등, 금당이 일직선으로 배치 된 것 같고 금당의 동서에 각각 하나의
비석이 있었던 것과 금당이 세 차례에 걸쳐 개축되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시대에 걸치는 각종의 기와와 함께 8세기 경의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되어 
이절의 창건연대를 짐작하는데 좋은 단서가 되었답니다.

자, 이제 계단으로 내려가 보실까요?
계단 측면의 소매 돌에는 불교에서 천상의 새로 여기는 가릉빈가가 새겨져있답니다. 
이 새는 불경에 나타나는 상상의 새로 극락에 깃들여 산다고 하여 극락조라고도 부른답니다. 
형상은 머리와 팔 등, 상체는 사람의 형상을 하였고 머리에는 새의 머리깃털이 달린 화관을 쓰고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입니다. 
훼손되어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계단분리석이 있는 것도 특이하죠. 
그리고 기단 면석에 안상이 조각 되어 있고요, 후면을 제외한 3면에 사자 또는 개로 보이는 
동물모양을 돋을새김 하였답니다.

그 밑으로 쌍사자 석등을 살펴보도록 저를 따라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영암사지 쌍사자석등은 영암사터에 세워진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933년경에 일본인들이 불법으로 반출하려던 것을 막아 가회면사무소에 보관 하였다가 
1959년에 절터에 작은 암자를 세우고 원래의 자리로 옮긴 것입니다. 
석등은 일반적으로 불법의 불을 밝혀주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위에는 지붕돌을 덮고 아래는 
3단구성의 받침을 두었는데요, 4개의 창이 난 화사석의 4면에는 두터운 돋을새김의 사천왕상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쌍사자로 된 중간받침 이외의 모든 부분은 8각으로 만들어져 통일신라의 특색을 
보이고 있답니다. 
1단의 받침돌에는 아래를 향한 연꽃잎이 두텁게 조각되어 있고 8각 면에는 동물모양이 
조각되어 있구요, 2단의 쌍사자는 꼬리를 치켜든 모습으로 위를 떠받히고 있는데 다리의 근육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힘찬 모습입니다. 

얇은 지붕돌 등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만든 양식이나 조각이 다소 형식화 되고 있어 9세기 
후반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 되어 집니다. 
속리산법주사의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과 함께 우리나라의 석등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주위의 수려한 산세와도 아주 잘 어울리고 있답니다. 
약간의 훼손으로 인해 국보가 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석등 아래쪽에는 석축을 높이 쌓고 양 옆으로는 금당지로 오르는 무지개형 돌계단이 정교하게 
설치되어 있습니다. 
좁고 경사가 심한 돌계단은 하나의 돌로 일곱 계단을 조성하였답니다. 
그 밑으로 영암사지 삼층석탑(보물제480호)은 영암사터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69년에 복원한 
화강암재 석탑입니다. 
높은 2중 기단에 몸돌은 1층에 비해 2층과 3층이 아주 괜찮은 편입니다. 지붕돌은 비교적 
얇고 평평하고요, 아래는 4단의 주름이 잡혀있습니다. 
몸돌의 비례가 정형을 벗어나 있지만 전체적 균형을 잃은 것은 아니고 각 부분의 구성도 
간결하여 소박한 느낌을 준답니다.
탑의 규모가 비교적 작고 지붕돌아래 부분의 주름이 4단으로 되어있어 5단으로 되어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탑보다는 늦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고, 9세기 후반 경에 세워진 
석탑으로 추측되고 있답니다. 

그럼, 이제는 위쪽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영암사지 귀부가 보입니다. 
영암사지 귀부는 금당터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남아있답니다. 
두 개의 비석은 비와장식이 없어졌고요, 동쪽 거북모양의 비석받침은 용머리에 목을 곧바로
세운 힘찬 모습입니다. 
겹줄로 귀갑문이 새겨진 등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강인함과 율동감을 느끼게 하고 있네요. 
서쪽 거북모양의 비석받침은 크기도 작고 움츠린 목에 등도 평평한 편인데요, 
두 개의 비석 모두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구요, 이러한 차이에서 동쪽의 
비석받침이 다소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어 지고 있습니다. 
동쪽 귀부는 길이255센티미터와 폭194센티미터로 서쪽보다 크나 형식은 대체로 같습니다. 
서쪽귀부는 길이219센티미터 와 폭170센티미터랍니다.

옆쪽으로 잠깐 쳐다보십시오.
당간지주로 보이는 이 돌기둥은 석문의 한 쪽 기둥으로 금당터 위쪽으로 세워져 있고요, 
이 석문 뒤쪽으로 건물터가 있어 보이는데 아직은 미 발굴 지역이랍니다. 
또 석문 주위로 수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우물터가 있지 않았나 생각되고 있습니다. 
가람 터로 보아서 이처럼 웅장하고 큰 사찰의 행방이 언제, 어떻게, 왜 사라지게 되었는지
 많이들 궁금하시죠? 
그래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들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날, 영암사에서 큰 법회가 열리게 되었답니다. 
왕자는 법회 참석을 위해 말을 타고 영암사를 방문하고자 달리는 중이었습니다. 
마침, 영암사에 다다른 계곡다리를 건너는 순간, 법회의 시작을 알리는 범종소리가 
우렁차게 울러 퍼졌습니다. 
놀란 말은 왕자를 태운 채로 계곡으로 떨어졌고 왕자는 큰 중상을 입어 반신불구가 되었답니다. 
이에 진노한 왕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절을 불태우게 하였고 불은 3년 동안이나 타올라 대가람 
영암사는 소리없이 사라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3년이나 넘게 타고 남은 것이라니, 절의 규모가 대단했으리라는 짐작을 전설로 전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제, 여러분들과의 헤어짐의 시간이 되었나 봅니다. 
오늘 여러분들과의 소중한 인연, 감사하게 느끼면서 미흡한 제 설명을 재밌게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순수한 우리말에 ‘느그림’이라는 단어가 있답니다. 
‘느그림’ 이란 오늘 있었던 여행길에서 재밌고 즐거웠던 일들을 조용히 집에 가셔서 떠올리며 
생각하는 것을 뜻하는데요, 여러분께서도 저와 함께한 영암사지의 모든 일들을 떠올렸을 때, 
즐거운 ‘느그림’이 되셨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만족도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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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05.03 14:3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