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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백제의 항쟁- 대야성

작성일
작성자
관광진흥과
조회수:
11732
이 스토리텔링은 대양성과 그 주변 유적에 대해 합천군 문화관광해설사 김학구 선생님이
만든 이야기 입니다.

대야성은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에 위치한  매봉산(취적산) 주위를 흙과 돌을 이용하여 
쌓은 성이다.
이 곳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 서부 지방의 접경지로 신라 진흥왕 25년(565년)에 신라가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쌓았다고 전해진다.

선덕여왕 11년 백제의 윤충 장군이 군사 1만 여명을  이끌고 대야성 앞까지 아무 저항 없이 
다다랐으며, 지금의 손목리(용주면 소재)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긴 여정으로 피로한 군사들의
피로를 풀게 한 후, 갈마산 정상에 올라 대야성을 공격할 연구를 해 보았지만 자연조건이 
뛰어나고 김품석이라는 젊은 장군이 성주로 있어 만만치 않게 생각되었다.

당시 대야성 성주였든 도독 김품석(김춘추의 사위)은 여자를 좋아하여 그의 부하 사지 
검일의 부인을 빼앗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3일이 지난 후 윤충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해 왔다. 대야성의 사지 검일이 와서 장군을 은밀히
 만나자는 전갈이었다.

검일은 눈물을 흘리며 “ 김품석이 나의 아내를 겁탈하고 빼앗은 원한을 장군께서 풀어주신다면 
이 목숨 장군을 위하여 바치겠다.”고 맹세하였다.
검일은 환영하는 윤충에게 말려들어 모든 군사 정보를 털어 놓고 말았으며, 여기 온 것을 비밀에 
붙여 줄 것을 부탁하였다.

“ 이 길로 성중에 가서 동지인 모척과 협력하여 성을 불 지를까 합니다.” 라고 윤충에게 고하였으나,  
윤충은 “사지 들어보시오. 성을 불사르기보다 병기와 식량 창고에 불을 질러 주면 그 기회를 타 
쳐들어가겠습니다.”고 제안 했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막사에 초병이 들어와서 “대야성에 불이 난 듯 합니다”라고 
보고했다. 윤충은 황급히 갈마산 중턱에 올라갔다. 
창고 몇 동이 불이 난 것이 분명하였다.
조금 있으니 검일과 모척이 가족과 병졸 몇 명을 데리고 윤충의 막사에 도착하였다.

이로 인하여 대야성은 큰 혼란에 빠졌고 전의를 잃은 신라군에게 윤충이 항복을 권유하자
품석은 보좌관이던 아찬 서천을 파견하여 항복하기를 자청하였다.

이 때 또 다른 보좌관인 죽죽이 백제의 융계를 역설하며 항복하지 않도록 만류하였으나 
품석은 듣지 않고 성문을 열어 군사들을 성밖으로 나가게 하여 백제의 복병에 의해 모두 죽임을 
당했으며, 이 소식을 들은 김품석도 처자와 함께 자결하고 말았다.

죽죽은 대야성에 남은 병사를 수습하여 백제에 항전하였다.
사지 용석은 항복을 하여 후일을 기하고자 하였으나 그대의 말도 옳지만 아버지가 
나를 죽죽이라 이름 지은 것은 추울 때에도 시들지 않고 꺾일지언정 굽히지는 말라 함이다.
‘어찌 죽음을 겁내 살아 항복하리오.’ 하고 힘써 싸우다가 용석과 함께 전사하였다.
윤충은 김품석과 그 처자의 목을 베어 백제 왕도인 사비성으로 보내고 남녀 
1,000여명을 사로 잡아갔다.

이 전투를 계기로 김춘추, 김유신이 백제를 멸망시킬 각오를 다짐으로써 
삼국통일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태조 왕건」, 「대왕의 꿈」, 「선덕여왕」 등의 드라마에 대야성이 신라와 백제 간 항쟁의 
중요한 장소로 등장하기도 했다.

인조 22년(1644년) 합천군수 조희인이 옛 격전지인 대야성 입구에 죽죽 장군의 얼을 깊이
새기고자 “신라충신죽죽지비” 라 새긴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합천 출신으로 진주 목사를 지낸 
한사 강대수가 지었다.

비문의 내용은
「여기 이 고장의 젊은이들에게 끝없는 용기와 긍지를 심어 주신 이가 계시니 그 이름 
죽죽이로다. 죽죽은 이 고장 출신 화랑으로서 신라 선덕여왕 때 사지라는 벼슬을 지내며 
대야성주 김품석 밑에서 성을 지키게 되었다.
선덕여왕 11년(서기642) 8월 백제 장군 윤충이 대군을 이끌고 대야성을 쳐들어 왔을 때 
성주 김품석은 주색에 빠져 정사를 외면하고 있었으며 부하 가운데 적과 내통하는 무리가 있어 
성은 함락 직전에 놓여 있었다. 
이에 젊은 용사 죽죽은 전우 용석과 함께 성문을 굳게 닫고 남은 병사를 이끌고 용감히 싸웠으나 
끝내 성은 함락되고 두 화랑의 선혈은 대야성을 붉게 물들였다. 
이 슬픈 소식을 듣고 선덕여왕과 김품석의 장인 김춘추는 백제 정벌의 비장한 결의를 다짐하게 
되었으며 이에 힘입은 신라 화랑들의 궐기는 훗날 삼국통일을 이룩하게 하였으니 신라 충신의 
장엄한 전사야말로 통일 신라의 채찍으로서 청사에 길이 빛나리라」

자리를 조금 옮겨 황강변의 아름다운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연호사는 
작은 절이지만 2,000여명의 영혼이 1,400년 동안 잠들어 있는 슬픈 사연을 지닌 절이다.
대야성 전투에서 장렬히 싸우다가 전사한 신라 장병 2,000여명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643년(선덕여왕 12년)에 와우선사가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후의 내력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연호사 바로 아래에는 고려 시대에 세워진 함벽루가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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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진흥과 관광마케팅담당 (☎ 055-930-4667)
최종수정일 :
2019.05.03 14:3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