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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지식인의 좌절된 꿈이 서려있는 학사대 전나무

작성일
작성자
관광진흥과
조회수:
10567
이 스토리텔링은 합천군 문화관광해설사 정해식 선생님이
'학사대 전나무와 최치원선생'에 관해 만든 이야기입니다.

고운(孤雲), 그는 누구인가? 천재 문장가인 최치원(857∼?)의 자(字)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 신라 사량부(沙梁部) 지금의 경주에서 6두품의 
신분으로 태어났으며, 
오늘날 경주(慶州) 최씨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다. 또 선생은 가야산해인사(伽倻山海印寺),
부산 해운대(海雲臺), 함양 상림(上林) 등 전국의 각처에 족적(足跡)을 많이 남기신 분이다.   

 868년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唐) 나라로 유학을 떠나, 18세에 빈공과(賓貢科)에 
장원 합격하였다. 
28세 때 신라로 귀국했으며, 신라 49대 헌강왕(憲康王)은 그를 당나라에 보내는 외교 문서 등을
작성하는 시독(侍讀) 겸 한림학사(翰林學士)에 등용하였다. 헌강왕이 죽은 뒤 
태산군(太山郡, 지금의 전북 태인), 천령군(天嶺郡, 지금의 경남 함양), 
부성군(富城郡, 지금의 충남 서산)의 태수(太守)를 지냈다.    

진성여왕(眞聖女王)때 수도인 서라벌 부근에만 통치권한이 한정될 정도로
정치적 위기가 악화되었다. 
선생은 894년 진성여왕에게 〈시무10조〉를 건의하였고, 진성여왕은 그를 6두품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阿飡)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그의 개혁은 중앙 귀족들의 반발로 실현되지 못했다. 
진성여왕이 물러나고 조카인 효공왕(孝恭王, 재위 897~912)이 즉위한 뒤, 
선생은 관직에서 물러나 각지를 유랑하고 가야산으로 들어갔으며,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쓸 때까지는 생존해 있었다.

 왜 가야산에 칩거하였는가? 선생은 그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등지고 
종적을 감추고자 했으며, 또한 최종 둔세(遁世)의 은둔처(隱遁處)로 
이곳 가야산 해인사를 선택했을까? 당나라 유학시절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문명(文名)을 떨치고 금의환향(錦衣還鄕) 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고국에서는 
골품제라는 신분제의 폐습이 남아있었으니, 육두품이라는 신분의 
제약 (능력의 10분의1도 발휘하지 못함)으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었고, 

그러한 실의와 좌절은 그로 하여금 결국 세상을 등지는 최종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짐작케 한다. 
그리고 선생의 친형이 현준(賢俊)스님인데, 당시 해인사에 주석(主席)하고 계셨기 때문에 
최종 은신처로 해인사를 선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선생의 족적(足跡)을 살펴보면, 해인사 주위 선생의 발자취로 살아 숨 쉬는 비경이 많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청량사(淸凉寺)는 선생이 세상을 등지며 해인사로 들어올 때 처음
 머물었던 곳이라 더욱 의미가 깊다. 
   
 농산정(聾山亭)은 홍류동(紅流洞) 비경(秘境) 소리길 16경 (가야산 19경중 하나)중 하나이며, 
계곡 옆 선생이 지은 정자로, 은거 생활을 하던 당시에 수도하며, 제자들과 글을 읽고 바둑을 
두었던 곳이다.   
건물을 세운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1922년 해체 원래대로 다시 지은 것을 
1936년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운암(孤雲庵)은 선생이 살던 초막골 이라는 이곳은 백련암의 맞은편으로  전망이 아주 좋다. 
선생의 자(字)를 따서 고운암이라 하였다. 
또한 최치원선생이 가족을 데리고 들어와 살던 곳을 치원촌(致遠村)이라 하였는데 
후에 치인촌(治仁村)이 되고 다시 지금의 치인리가 되었다.

길상탑(吉祥塔)은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양식인 2기단 3층 석탑이다. 
1966년 전국적 도굴범들을 수사하던 중 자백으로 알게 되었으며, 
선생이 지은 4매의 지석(誌石)과 흙으로 빚어 구운 157개의 소탑(小塔)이 발견되었다. 
탑지에 적힌 내용에 따르면 이 탑은 진성여왕 때 사찰을 지키다 희생된 56명의 스님과 
관계자를 기리기 위해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탑지와 소탑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학사대(學士臺) 전나무는 선생이 말년에 가야금을 연주하면 수많은 학들이 경청하였고
 또 한림학사 벼슬을 따서 학사대라 하였다. 
한날은 선생이 제자들을 다 불러놓고 자기의 지팡이를 꽂으면서 
“내가 살아있으면 이 나무도 살아있을 것이다.
 이 나무가 살아있는 한 너희들도 학문에 열중 하여라”하며 진대밭골 쪽으로 사라졌다는 
구전이 전해오는 곳이다.     
나무의 굵기나 높이에 있어서도 보기 드문 큰 전나무로 지팡이를 꽂았다고 전해지는 
수령이 1,100년 이상 추정되는 천연기념물 노거수이다.

   선생이 속세를 떠나 입산하면서 지은 시 즉, 입산시(入山詩)

 僧乎莫道靑山好  (승호막도청산호)
 스님네여 청산이 좋다고 말하지 마소.
 山好何事更出山  (산호하사갱출산)
 산이 좋다면서 왜 산 밖으로 나오려고 하시는가?
 試看他日吾踪跡  (시간타일오종적)
 훗날 내가 어찌하는지 두고 보소.
 一入靑山更不還  (일입청산갱불환) 
 나는 한번 청산에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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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진흥과 관광마케팅담당 (☎ 055-930-4667)
최종수정일 :
2019.05.03 14:3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