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비석은 구산(龜山) 윤탁(尹鐸, 1554∼1593)과 추담(秋潭) 윤선(尹銑, 1559∼1640)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2기의 신도비이다.
구산 윤탁은 조선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고, 1593년에는 진주성에 들어가 왜적을 막다가 순절하였다. 추담 윤선은 임진왜란 기간 동안 세자(世子)의 막하에서 활동하였고, 광해군 때 의정부 우참찬을 지냈다.
이 2기의 비석은 모두 신축년(1901년)에 세워졌는데, 내용만 다를 뿐 재질과 모양 및 크기가 서로 같다. 귀부(龜趺)와 이수(이首)는 진양석(晉陽石)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신(碑身)은 사암(沙岩)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신의 가로·세로·두께는 각각 87㎝·236㎝·27㎝이다. 바라보는 쪽에서 오른편에 있는 비석이 구산 윤탁의 신도비이고, 왼편에 있는 비석이 추담 윤선의 신도비이다.
구산 윤탁의 신도비는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1842∼1910)가 지었고, 추담 윤선의 신도비는 성재(性齋) 허전(許傳, 1797∼1886)이 지었으며, 글씨는 2기 모두 이곡(梨谷) 하인수(河仁壽, 1830∼1904)가 썼다.
이 2기의 신도비는 그 크기나 주인공 및 찬자(撰者)와 서자(書者)의 명성으로 보더라도 충분히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특히 이들 신도비는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가 와해되어 북인이 거의 사라지고 없는 상황에서, 조선후기까지 북인임을 자처했던 집안에 의해 세워진 비석이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