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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파 이주홍 선생은 1906년 5월 20일 합천군 합천읍 배양골(巳里, 현재 금양리 사동마을)에서 소농이었던 아버지 이정식과 어머니 강정화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향리의 서당과 합천보통학교(합천초등학교)를 거치면서 전통 한학과 신학문을 아울러 배운 그는 일찍부터 또래 소년들과 『삼우(三友)』, 『형제(兄弟)』와 같은 회람잡지를 만들면서 문학의 꿈을 키웠다. 합천의 한시 대가였던 외숙 강만달의 가르침을 받았고, 동생 이성흥 또한 유년시절부터 오랜 글벗이었다.
향파는 1920년 서울로 올라가 고학을 하며 한성중학교를 다녔다. 1924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낮에는 지게를 지고 인력거를 끄는 고된 노동을 하고 밤에는 동경 정칙영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다. 1928년부터 광도(히로시마)에 머물면서 교포자녀들의 교육을 위하여 양인환 등과 함께 사립 근영학원에서 조선 아이들에게 조선말과 역사를 가르치고 연극 공연을 통해 민족의식을 드높였다. 그 일로 1929년 일본 경찰에 의해 추방 명령을 받고 일본을 떠나 귀국했다.
1929년 서울로 돌아와 자신이 일찍이 『신소년』에 투고했던 「배암색기의 무도」가 1928년 5월호에 당선된 것을 알게 되었다. 신소년사에서 편집 일을 맡은 이주홍은 1929년 12월 『여성지우』에「결혼전날」이 입선되면서 소설가로도 나섰다. 이후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아동문학 기관지인 『별나라』편집에 참여하면서 창작․출판미술․편집에 뛰어난 재능을 떨쳤다.
1931년 프롤레타리아 동요집 『불별』과 『농민소설집』발간을 이끌었고, 잡지 『집단』에서 활동하다가 1934년 제2차 카프 검거로 한동안 일본 경찰에 쫓겨 낙향했다. 1936년 무렵부터 다시 서울로 올라가 잡지 『풍림』, 『신세기』를 편집하고, 시나리오 「여명」을 발표하면서 사상 탄압과 시대적 암울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문학을 향한 열정을 꽃피웠다.
1940년대 가난과 고통 속에서 향파는 만화와 출판미술로 몸을 낮추며 격랑을 피해 살았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의 태평양침략전쟁 말기인 1945년 봄 향파는 서울에서 일본경찰에 의해 사상불온자로 체포되어 합천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가 거창검사국으로 압송, 고초를 겪다가 광복 다음날인 1945년 8월 16일에 풀려났다. 당시 합천경찰서 유치장에 면회 온 어머니를 철장 넘어 보고 애닲은 마음으로 한시를 읊은 것이 현재 남아 있다.
광복 뒤 향파는 서울 배재중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연극이야말로 새 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된다는 믿음으로 희곡 창작과 연출 활동을 이끌었다. 또한 <조선문학가동맹>에 들어가 시분과, 미술분과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광복기의 굵직굵직한 주요 잡지와 낱책의 출판미술을 도맡아 많은 작품을 남겼다. 1947년 부산으로 내려온 향파는 동래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국립 수산대학교(현 부경대학교) 교수로 일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그 뒤 『문학시대』, 『갈숲』, 『윤좌』편집을 통해 부산․경남지역문학의 뼈대를 다듬는 향파는 1972년 수산대학교를 정년할 때까지 왕성하고도 꾸준한 작품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83년에 와병에 들어 1987년 향년 81세로 영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