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번역시스템을 이용하여 자동 번역중입니다. 번역이 정확하지 않을 경우가 있습니다.
It is under automatic translation using Google translation system. The result may not be accurate.
다라국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공간이다.
황강의 물길을 이용하여 교역품이 오가는 광경을 재현했으며, 가야 여러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철기를 생산하는 현장, 구슬을 가공하는 모습, 다라국의 지배자들이 묻혔던 옥전고분군 등을 미니어처로 살펴볼 수 있다.
옥전고분군에서 출토된 말갖춤으로는 말을 제어하는 도구인 재갈, 말을 탄 사람의 자세를 유지하기 위한 안장틀과 발걸이, 말에 착용시키는 장식품인 말띠드리개와 말띠꾸미개, 말방울, 그리고 전투에서 말을 보호하기 위한 말투구와 말갑옷 등이 있다. 갑옷과 투구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착용하는 방어용 무구임과 동시에 착용하는 사람의 권력을 상징하는 위세품이기도 하다.
삼국시대에는 금·은, 각종 옥 등으로 만든 화려하고 다양한 장신구가 유행하여 장식의 용도뿐만 아니라 착용하는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쓰였다. 옥전고분군에서 출토된 장신구는 목걸이와 귀걸이, 금동관, 은제관, 관모 허리띠 장식, 신발, 팔찌, 반지 등 다양하다.
대표적인 지배자의 상징물로서 옥전 23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모는 5세기 전반대에 다라국이 성립되었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옥전 M6호분에서 출토된 출자형금동관은 다라국과 신라와의 교류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가야의 귀걸이를 살펴보면 금동제품과 함께 금제품도 많이 있다. 형태는 가는고리에 여러 모양의 드리개를 부착한 것이 대부분이며 신분이 낮은 계층에서는 드리개 없이 고리만 있거나 작은 유리구슬을 달아매어 착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가야의 귀걸이는 합천 옥전고분군과 고령 지산동고분군을 중심으로 사용되다가 차츰 함양, 진주, 고성 등지로 퍼져나갔으며 점차 호화로운 장식이 더해져서 드리개의 경우 낙하산, 원추, 하트모양 등으로 다양해졌다.
미늘쇠는 대체로 4세기 대에 출현하였으며 초기에는 주로 권위의 상징물로서 대형무덤에 부장되었다. 일반적으로 덩이쇠를 이용하여 동그랗게 휘감긴 고사리모양과 새모양으로 미늘을 표현하였는데 , 특히 옥전고분군에서는 새모양을 잘라 붙여 상징성을 강조하였으며 일본 후지노끼고분 출토 관장식에도 이러한 새모양이 장시되어 있어 주목을 끈다.
가야는 통합된 정치체로서의 단일국가가 아니라 여러 지역의 연맹체이기 때문에 각 지역마다 독특하고 다양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특히 토기문화에 있어 이러한 특징이 더욱 두드러지기 때문에 각 지역권마다의 토기 양식의 규명은 개별적인 해당 집단의 규모, 존속기간, 영향력뿐만 아니라 가야연맹의 전반적인 성격과 규모를 가늠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유리잔은 주로 신라의 대형 무덤에서 출토되었는데, 가야지역의 고분 가운데는 옥전 M1호분에서 유일하게 한 점 출토되었다. 이 유리는 지중해 유역에서 제작된 로만글라스로 서역과의 교역을 통해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리자루큰칼은 백제와 신라, 가야의 왕릉급 무덤에서 출토되어 무덤주인공의 신분을 나타내는 유물이다. 대부분 금이나 은 또는 금동으로 화려하게 장식되며 고리 안에도 여러 가지 문양이 장식된다. 고리 안에 장식된 문양에 따라 세잎고리자루큰칼, 세고리자루큰칼, 용문양고리자루큰칼, 봉황문양고리자루큰칼, 용봉문양고리자루큰칼 등으로 나누어진다. 이 가운데 세잎고리와 세고리자루큰칼은 신라권의 대형 무덤에서, 용문양 또는 봉황문양고리자루큰칼은 백제와 가야지역의 대형무덤에서 주로 출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