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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조의 기반이 확립되고 사회구조가 정립된 것은 성종(成宗)대였다. 이후 고려의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국가체제는 현종(顯宗)을 거쳐 정비되고 문종(文宗) 때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성종대에는 지방행정상의 요지에 12목(牧)을 설치하였고 전국에는 십도제(十道制)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주 중심의 지방행정의 전통으로 인해 십도제는 지속되지 못하고 소멸되었다. 현종대에는 4도호(都護) 8목(牧)과 56지주군사(知州軍事) 28진장(鎭將) 20현령(縣領)을 설치하였다. 이때의 지방관제가 고려시대의 기본구조가 되었다.
위와 같은 지방관제와 함께 고려시대의 최고 지방행정 구역으로 경기와 함께 5도 양계가 있었다. 남방의 5도와 북쪽의 양계가 차지하는 통치조직상의 위치는 매우 큰 것이었다. 후기의 5도를 말할 때 흔히 양광도(楊廣道), 경상도(慶尙道), 전라도(全羅道), 서해도(西海道), 교주도(交州道)를 들어왔다. 합천지역을 포함한 이 지역이 경상도라는 이름으로 고정된 것도 고려후기의 일이다.
위와 같은 지방관제의 변천은 합천지역도 많은 변화를 거쳤음에 틀림없다.『고려사』지 권11 지리2 에 의하면, 합천은 본래 신라 대랑주군(大良〔耶〕州郡)인데 경덕왕 때에 고쳐서 강양군(江陽郡)이 되었고, 현종이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서 즉위함에 이르러, 모후(母后)인 효숙왕후(孝肅王后)의 고향이므로 승격되어 지합주사(知陜州使)를 두고 12개의 속현을 거느렸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상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합천은 경상도에 속했고 외관이 파견된 지역으로서 시기에 따라 조금의 변화는 있었지만 12개의 현(縣)이 소속되어 있었던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억렴은 지대야군사(知大耶郡事)였다. 현종의 모 효숙왕후는 태조의 왕비인 신정태후(神靜太后) 황보씨의 아들 욱(旭)의 둘째딸로서 경종의 비가 되어 헌정왕후(獻貞王后)였는데 현종이 등극한 후에 효숙왕후로 봉하였다.
현종 9년에 할머니 신성왕후의 고향인 지금의 합천을 주로 승격시켜 합주로 하여 지금의 ‘陜’자를 처음 쓰게 했다. 이상으로 보아 현종은 대량원군 시절에 합천 옥산의 잠저에 있을 시기는 2살에서 12살 사이로 합천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군호(君號)가 합천의 옛이름인 대량원군이었음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고려의 군사제도는 중앙에 2군(軍) 6위(衛)가 지방에는 주현군(州縣軍)이 있었다. 5도의 주현군은 그곳 수령의 지휘하에 일반농민들로 구성되어 농사에 종사하면서 군역을 치렀다. 주현군은 보승(保勝), 정용(靜勇), 일품군(一品軍)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승, 정용은 전투부대이고 일품군은 노동부대였다. 보승, 정용은 상비군은 아니었지만, 이들은 군사적 훈련에 임하기도 하고 농경에도 종사했다. 보승, 정용을 구성한 주현군은 주로 자영지를 소유하고 스스로 그것을 경작한 농민들이었다. 일품군은 노동부대로서 공역을 위하여 편성된 군인이었다.
『고려사』병지(兵志) 권3 경상도조(慶尙道條)에 의하면, 경상도에는 보승 2,627명, 정용 4,811명, 일품군, 5,702명 모두 1만 3천 1백 40명이 있었다. 합천은 합주로서 보승 373명, 정용 229명, 일품군 448명 모두 1,050명이었다.
무인집권기는 정치·경제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많은 혼란이 야기된 시기였다. 이른바 민란으로 불리는 농민과 천민의 봉기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이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특히 명종(明宗)·신종(神宗)때의 30여 년간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농민항쟁의 선행단계라 할 수 있는 백성들의 유민화는 예종(睿宗)때부터 상당히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이 무인집권기에 이르러 수탈이 가중되자 마침내 대규모 항쟁으로 폭발한 것이다.
합천지역도 예외는 아니어서 진주지역과의 관련 속에서 봉기가 일어났었다. 신종 3년(1200) 4월에 진주의 공사노예(公私奴隸)가 떼를 지어 주리(州吏)의 집 50여 호를 습격하여 불사를 때, 주리의 한명이었던 정방의(鄭方義)의 집도 연소되었다. 이에 정방의는 아우 정창대와 함께 주리(州里)를 부수었을 뿐만 아니라 평소에 원한을 가지고 있던 6,400명을 죽이고 목사 이순중(李淳中)을 협박하는 한편, 읍내에서 은병(銀甁)을 거두어 개경의 권문세족에게 뇌물을 주어 죄를 면하려 했다. 같은 해 5월 조정에서는 소부감(小府監) 조통(趙通)과 중랑장(中郞將) 이당적(李唐績)을 보내어 안무하도록 했는데, 조통 등이 진주에 이르렀을 때에 정방의의 포학이 심했으나 별다른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위협을 느낀 진주의 봉기민들, 즉 공사노예와 일반 농민 20여 명은 그곳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합주에 가서 연합하였다. 이곳에서도 그전부터 노올(奴兀)부곡민을 중심으로 광명계발(光明計勃)이라는 사람 주도하여 항쟁이 일어나 상당한 세력을 펴고 있었는데, 이들과 연합하여 정방의와 대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주와 합주의 연합세력도 결국은 정방의에 의해 패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방의 형제의 포학 역시 진주민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종식되었다.
이상으로 보아 합천지역의 농민·천민의 저항을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다른 지역에서처럼 항쟁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종 41년(1254)에 거라대(車羅大)가 침략해 왔을 때, 군사를 뒤로 물릴 것을 청하려 최린(崔璘)을 몽고병의 둔소인 합천 단계현에 보냈다는 기록이『고려사』세가 권24 고종 41년 12월조에 보인다. 이로보아 이 시기에 합천지역에 몽고군의 근거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합천지역도 몽고군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몽항쟁과 관련하여 지금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재조대장경)이 만들어졌다. 이것은 불력으로 몽고의 침입을 막아보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장경사업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것은 무인지배층이었고, 이들은 대장경을 구심점으로 삼아 일반 백성들의 단합을 꾀하여 이들 중심의 대몽항쟁을 지속시키면서 자기네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 강화도의 대장경판당에 있던 대장경이 지금 보관중인 해인사로 옮겨진 시점은 조선 태조 7년(1398) 전후였을 것이다. 강화도내의 선원사에 안치되었던 대장경판이 태조 7년을 전후하여(아마 태조 6년인 1397년부터 정종 원년인 1399년까지) 서울을 거쳐 해인사로 옮겨졌던 것이다.
고려말에 들어와서 고려를 괴롭힌 외침세력으로 또 왜구가 있었다. 왜구들의 침탈지역은 전국에 걸쳐 있었는데 연안뿐만 아니라 내륙지역에 까지도 횡행하기도 했고, 개경 가까이 출몰하기도 했다. 합천지역의 왜구 침탈은 우왕(禑王) 5년(1379) 9월에 “왜구가 단계·거창·야로 등의 현으로부터 가수현에 까지 이르러 도순문사 김광부가 더불어 싸웠으나 패사했다”라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