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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지역의 갑옷(甲)과 투구(胄)는 원래 나무 혹은 가죽 등으로 제작된 유기물제(有機物製) 갑주로 추측되나, 모두 부식되어 완전한 형태의 실물로 남아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뭔가의 요인에 의해 이러한 갑주가 철제로 전환되어, 전혀 새로운 계보의 철제 갑주(鐵製甲胄)가 낙동강 하류역―김해·부산―과 울산·경주지역을 중심으로 4세기 전반부터 갑자기 그것도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습니다.
이 무렵부터 6세기 전반에 걸쳐 낙동강 하류역―금관가야―에서 발견된 갑주의 종류로는 세장판혁철주(細長板革綴胄) 또는 복발형주(伏鉢形胄)로도 불리는 몽고발형주(蒙古鉢形胄), 세로로 기다란 철판을 잇대어 못으로 박아 만든 종장판단갑(縱長板短甲), 조그마한 철판(鐵板)을 가죽끈으로 엮어 만들어서 착용했을 때 몸의 움직임이 자유스러운 괘갑(·甲), 삼각형의 철판을 가죽끈으로 묶거나 못으로 박아 만든 삼각판단갑(三角板短甲), 방형의 철판을 가죽끈으로 묶어 만든 방형판혁철단갑(方形板革綴短甲)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철제의 갑옷과 투구는 시기별로 뚜렷한 특징이 나타날 뿐만 아니라 계보도 각각 다릅니다.
금관가야 지역에서 확인되는 4세기대의 철제갑주는 몽고발형주, 종장판단갑, 괘갑, 방형판혁철단갑인데, 이 중 방형판혁철단갑은 4세기 후반대로 추정되는 부산 동래 복천동 64호분 출토의 1예가 유일한 것이므로 예외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4세기대의 가야 갑주를 대표하는 것은 몽고발형주, 종장판단갑, 괘갑입니다.
이 중에서 몽고발형주와 괘갑은 북방 유목민족의 갑주에 원류를 두고 있으며, 이것들은 3세기말 낙동강 하류역으로의 북방문화의 대거 유입 당시에 들어 왔다는 견해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한편 종장판단갑은 중국 및 중국 북방을 비롯한 어떠한 지역에서도 유례가 확인되지 않는 점으로 보아 본래 영남 지역 특유의 갑옷 형식임이 분명합니다. 즉, 이 갑옷은 삼한시대에 유기질제 갑옷, 즉 목갑(木甲) 또는 피갑(皮甲)이었으나 북방으로부터 새로이 유입된 몽고발형주, 괘갑의 자극에 의해 철제로 전환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몽고발형주와 괘갑은 원래 북방 유목민족에 특유한 기승용갑주(騎乘用甲胄)이며, 종장판단갑은 그 형태 및 삼한시대에 기마 습속이 없는 점으로 보아 보전용(步戰用) 갑옷이었습니다. 그런데 괘갑 제작상의 어려움 때문에 철제종장판단갑(鐵製縱長板短甲)은 기전용(騎戰用)으로도 쓰였습니다. 이는 북방 유목민족 사이에서 괘갑과 「세트」를 이루어 기승용갑주(騎乘用甲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몽고발형주가 종장판단갑과 한 벌로 고분에 부장되어 있는 예가 꽤 있는 점, 그리고 실제로 기승용의 재갈도 이들 고분에서 함께 출토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나아가 4세기대의 가야에서는 이와 같이 북방 유목민족과는 달리 몽고발형주는 종장판단갑과 한 벌이 되는 것이 오히려 보편적이었습니다.
괘갑은 4세기대의 가야에서는 소유가 꽤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괘갑 제작의 어려움에 따라 공급이 제한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괘갑은 4세기대의 가야에서는 그 소유자의 신분이 상위신분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갑옷을 기준으로 할 경우 4세기대는 한마디로 ‘단갑(또는 판갑)의 시대’로 묘사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4세기대의 이러한 철제갑주가 북방 갑주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북방에서 제작된 갑주인 것은 아니고, 북방 갑주의 영향이 시종 가야 갑주에 작용하였다는 것도 아닙니다. 북방 갑주가 가야의 갑주에 영향을 끼친 기간은 3세기 말의 꽤 한시적(限時的)인 시기였으며, 그 후에는 북방 갑주와의 교감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북방 갑주가 유입되었다 하더라도 오로지 북방제 갑주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즉시 가야에서 제작하였음을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는 가야의 고도로 발달된 철기문화가 기반이 된 것이며, 원래 유기물제 단갑이었던 것이 4세기 전반 무렵 일시에 철제로 전환하는 종장판단갑의 예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습니다.
4세기대의 가야 갑주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그 형식이 지역별 차이가 없이 통일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다량으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철제 갑주가 정형화(定型化)되어 있고 대량 생산되었다는 것은, 이들이 전문공인집단(專門工人集團)에 의해서 제작된 것이며, 그것으로 중무장한 전사단(戰士團), 즉 강력한 전문 군대조직이 존재하였음을 웅변해 주는 것입니다. 함께 출토되고 있는 기승용 마구로 보아 그들은 기마전단(騎馬戰團)이었습니다. 이러한 강력한 전사단의 존재는 가야가 이때부터 고대국가의 단계로 돌입하였음을 생각하게 해 주는 유력한 증거가 됩니다.
한편 5세기대가 되면 가야의 갑주에는 일대 변혁이 나타납니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4세기대 철제 갑옷의 주류를 이루었던 종장판단갑이 현저하게 줄고 그 대신 4세기대에는 특정 지배자층의 전유물이었던 괘갑이 급속히 확산되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갑주의 획기적인 변화는 5세기 초에 고구려가 가야 지역에서 행한 대규모 군사 작전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말하자면 이러한 긴장에 의해 우수한 기능의 괘갑이 급격히 보급됨에 따라, 효용성이 떨어진 단갑의 제작은 필요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종장판단갑은 5세기 중엽에 완전히 중단되고 있으며, 대신 가야에 꼭 필요한 단갑은 일본에서 공급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5세기 중엽이후의 가야 고분에서 발견되는 삼각판단갑(三角板短甲), 횡장판단갑(橫長板短甲), 충각부주(衝角附胄) 등 일본계 갑주가 이를 말해줍니다. 그러나 5세기 이후 시종 가야 갑주의 주류를 이루었던 것은 몽고발형주와 괘갑이었습니다.
따라서 갑옷을 기준으로 할 경우, 4세기대의 가야가 「단갑의 세기」였다면, 5세기 이후의 가야는 「괘갑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갑주의 이러한 변화는 5세기의 가야사회가 격전 및 격변기로 들어섰으며 그와 동시에 급격히 재편(再編)되어 갔음을 웅변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