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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에 기마용 마구(騎馬用馬具)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는 것은 4세기대의 일입니다. 이는 부산 복천동 69호분, 38호분 등 4세기 전반대의 고분을 비롯하여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4세기대 고분들에서 기마용 재갈, 발걸이(子), 말띠드리개(杏葉) 등이 꽤 발견되고 있는 점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현재 철제 마구 중 가장 오래된 것이 4세기 전반대의 것이라 하더라도 기마용 마구의 등장 시점이 반드시 이 시기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 정황으로 보아 3세기 말 낙동강 하류역―김해·부산―에 북방 문화가 대량으로 유입되었을 때, 이들과 함께 들어왔음이 분명합니다.
근년에 가야 마구의 정밀한 연구들에서 명백하게 밝혀지고 있듯이 4세기대 가야 마구의 원류는 중국 동북 지방의 마구에 있으나, 현재 가야 최고(最古)의 마구인 위의 복천동 69호분과 38호분의 재갈은 중국 동북 지방의 재갈 그대로가 아니라 이미 가야화(加耶化)가 꽤 진행된 것입니다. 아마도 3세기 말~4세기 초의 마구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은, 이 시기의 마구가 목제 등 부식되기 쉬운 유기질제의 마구였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따라서 가야의 기마 습속(騎馬習俗)의 수용 시기는 3세기 말로 확정지어도 좋습니다. 이때 함께 출토되는 갑옷과 투구(甲胄)로 보아, 가야 사회에서는 단순히 마구만이 아니라 기마 전술도 함께 받아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 영남 지역―가야·신라―에서 기승용 마구(騎乘用馬具)가 최초로 등장하는 지역은 낙동강 하류역―금관가야―이며, 이것이 차츰 가야 각지와 신라로 파급되어 갑니다. 현재까지의 발굴 성과로 보는 한, 신라에 마구가 전파되는 것은 4세기 중엽이후의 일이며, 이는 금관가야에 비한다면 약 반세기 이상 늦은 것으로 판명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기마 습속의 존재는 갑주 문화와 결부될 경우 매우 강력한 기마전단(騎馬戰團)이 존재하였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원거리 전쟁 수행, 즉 정복전쟁이 가능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헌 기록에 의한 이해와 달리, 기마 전단의 보유 여부로 볼 때, 4세기대의 가야 사회가 신라 사회보다 한 단계 앞선 실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세기 말에 가야 지역에 수용된 마구는 이후 그 원류지인 중국 동북 지역과 단절된 채 가야 독자적으로 발전을 거듭하다가, 5세기 초 가야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대규모 군사 작전 때문에 가야의 마구 문화는 비약적으로 발전할 뿐만 아니라 널리 보급·확산됩니다. 한편 이 무렵에는 신라의 마구도 기왕의 가야로부터의 영향 외에 고구려 마구 문화를 수용하여 크게 발전해 나갑니다. 동시에 고구려군의 남정(南征)이 주요 원인이 되어 가야 주민이 일본열도로 대거 이주함에 따라, 5세기 전엽에 일본에도 기마 문화가 이식됩니다. 이와 같이 신라와 일본의 기마 문화가 원래 가야의 그것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특기할 만한 일입니다.
5세기 전엽 금관가야의 쇠퇴에 따라 가야 사회가 재편되자, 5세기 후반대에는 가야의 마구와 신라의 마구가 뚜렷한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그리하여 신라는 고구려 문화의 적극적 수용에 의해 중국 동북 지방, 즉 고구려와 신라「라인」이라고 할 만한 마구 문화를 형성하는데 비해, 가야는 백제와의 문화적 접촉과 일본열도로의 지속적인 파급에 의해 백제와 가야 및 일본열도로 이어지는 마구 문화를 꽃피웁니다. 일본에서 발견되는 말띠드리개(杏葉)가, 신라의 편원어미형(扁圓魚尾形) 말띠드리개가 아니라 대가야를 중심으로 출토되는 이른바 검능형(劍菱形) 말띠드리개라는 점이 이를 가장 잘 대변해 줍니다.
동시에 가야의 마구는 변함없이 시종 실용 마구(實用馬具)로 발전되어 나감에 비해, 5세기 후반의 신라의 마구는 실용이 아닌 장식 마구(裝飾馬具)로 발전해 나간다는 데서 커다란 차이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5세기 후반부터 신라가 왕후귀족적(王侯貴族的) 문화로 발전해 나감에 비해, 가야는 시종 긴장관계에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하는 당시의 정세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입니다.
기승용 마구 문화가 지니는 의의는 큽니다. 그것은 기마 습속의 존재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갑주와 결부될 경우 기마 전술의 수용과 동시에 강력한 기마전단(騎馬戰團)을 보유하였음을 실증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를 소유한 사회는 이미 국가 단계로 돌입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3세기 말 가야의 기마용 마구의 수용과 이후의 독자적인 발전은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