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번역시스템을 이용하여 자동 번역중입니다. 번역이 정확하지 않을 경우가 있습니다.
It is under automatic translation using Google translation system. The result may not be accurate.



서기 3세기 중엽에 저술된 중국의 역사책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진변한 사람들은 금은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구슬을 꿰어 보배로 삼는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실제 이 시기의 무덤을 조사한 결과 이 기록의 내용처럼 금과 은으로 만든 물품은 출토되지 않으며 구슬로 만든 장신구만 출토되고 있습니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서기 3세기대까지 유행한 장신구는 바로 수정이나 마노(瑪瑙)를 주판알 모양으로 깎거나, 유리로 곱은옥(曲玉)이나 둥근옥(球玉)을 만든 목걸이였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목걸이는 김해 양동리 322호묘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이 목걸이는 투명한 수정을 다듬어 만든 곱은옥 148개에 붉은 빛의 마노, 남색의 유리옥을 곁들여 만든 것으로 색감의 조화가 뛰어납니다. 그런데 이처럼 구슬로 만든 목걸이는 진변한 지역뿐만 아니라 마한 지역에서도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이 시기의 장신구 가운데 금속품은 그 예가 매우 드문 편입니다.김해 구지로 12호묘에서는 모자의 부속품으로 보이는 얇고 길쭉한 철띠가 머리 쪽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청동제 팔찌도 함께 출토되었는데 표면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것입니다. 김해 구지로 42호묘에서는 청동제 말모양띠고리(馬形帶鉤)가 출토되었는데, 이러한 모양의 띠고리는 천안의 청당동이나 청원의 송대리 등 마한지 역의 목곽묘에서 많이 출토되는 것이며 영남지방의 경우 상주의 성동리 분묘군이나 경주의 조양동 60호묘에서 출토된 바 있습니다. 아직 연구가 더 필요하지만 마한 지역으로부터 유입된 물품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김해구지로 12호 팔찌 김해구지로 12호 팔찌
마형대구 마형대구
금동관 금동관
팔찌 팔찌

그런데 서기 4세기가 되면 장신구에 있어서 변화가 보이게 됩니다. 진한의 뒤를 이은 신라에서는 새로이 비취로 만든 곱은옥(曲玉)이 출현하였고 4세기 후반이 되면 황금제 장신구가 활발히 제작됩니다. 마한의 뒤를 이은 백제의 경우 중국의 진(晋)나라로부터 수입한 금동제 장신구가 사용되었으며 5세기가 가까워지면서 고구려로부터 금공 문화가 본격적으로 이입됩니다. 그러나 변한의 토대 위에서 성장하던 가야 지역의 경우 여전히 구슬을 선호하는 등 앞 시기의 장신구 문화를 그대로 계승하여 발전시켰습니다. 금관국의 왕족 묘역인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경우 4~5세기대의 대형 무덤에서도 유리구슬로 만든 목걸이가 장신구의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18호묘의 경우는 예외적으로 벽옥제 대롱옥(管玉)과 비취제 곱은옥이 출토되기도 하였습니다. 대체로 5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가 되면 함안의 안라국, 합천의 다라국, 고령의 가라국을 중심으로 황금 문화를 꽃피우게 됩니다.

가야의 장신구 가운데 금속으로 만든 것으로는 관, 귀걸이, 팔찌와 반지, 허리띠장식이 있지만 금귀걸이만 출토 사례가 많을 뿐 다른 장신구는 매우 소량만 확인되고 있습니다.

먼저 가야의 관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3세기 후반대로 편년되는 김해 대성동 29호묘 출토 관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금동관(金銅冠)은 도굴갱 내에서 출토된 조각이어서 추후 상세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전형적인 가야의 관은 주로 5세기 중엽 이후 대가야 지역에서 출토됩니다. 고령 출토품으로 전하는 호암미술관 소장의 금관이나 고령 지산동 32호묘 출토 금동관에서 볼 수 있듯이 초화형(草花形)의 세움장식(立飾)이 특징이며 형태적으로 신라에 비한다면 매우 간략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산동 30호묘에서는 소형의 관이 출토되었는데 아마도 소년의 소유물로 여겨지며, 합천 옥전 M6호묘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신라관과 외형적으로 유사하지만 제작 기법이 달라 신라의 영향을 받아 합천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귀걸이 (옥전20호) 귀걸이 (옥전20호)
귀걸이 (옥전23호) 귀걸이 (옥전23호)
귀걸이 (옥전M11호) 귀걸이 (옥전M11호)
귀걸이 (옥전M3호) 귀걸이 (옥전M3호)
귀걸이 (옥전89호) 귀걸이 (옥전89호)

가야의 귀걸이는 주로 대가야권에서 출토되는데 가라국과 다라국의 옛 터인 고령의 지산동·본관동과 합천의 옥전 고분군에 중심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함양 백천리, 진주 중안동, 고성 율대리, 창원 다호리 고분군에서 고령 양식 토기와 함께 출토되고 있습니다. 가야 귀걸이의 형태를 보면 굵은고리 귀걸이(太環耳飾)는 없으며 모두 주환(主環)이 매우 가는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중간장식으로는 속이 비어있는 둥근장식(球體)을, 그 아래에는 사슬형 금구를 이어서 하트모양(心葉形) 또는 원뿔모양(圓錐形) 드림을 매달았습니다.

그런데 이는 일본의 5~6세기대 무덤에서 출토되는 귀걸이와 그 구조가 매우 닮아 있어 주목됩니다. 아마도 일본의 귀걸이 제작에 대가야의 기술자 집단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이외에 함안의 도항리 11호 석곽묘에서 출토된 귀걸이는 길쭉한 사슬과 속이 빈 구슬을 교대로 연결하고 있어 안라국 귀걸이만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옥전 20·23호묘와 M11호묘 출토품은 백제 귀걸이와 유사하고, 옥전 M3호·89호묘 출토품은 신라 귀걸이와 매우 유사하므로, 각각 백제와 가야에서 제작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야의 허리띠장식 중 현재까지 알려진 예는 합천 옥전 M1호묘와 M11호묘 출토품이 있습니다. 전자는 두잎무늬(雙葉紋)를 기본 도안으로 제작한 것인데 이러한 도안은 황남대총 남분이나 일본 중기(中期) 고분의 신개(新開) 1호분, 칠관(七觀) 고분 등에 유례가 있는 것입니다. 후자는 백제의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허리띠장식과 기본형이 유사합니다.

팔찌의 경우 합천의 옥전 M2호묘에서는 금제, 진주 중안동에서는 은제, 옥전 28호묘에서는 동제품이 출토되었습니다. 형태는 신라에 비하여 가늘지만 표면에 새김눈(刻目)을 장식하고 있는 점은 백제나 신라와 공통적인 모습입니다. 가야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는 달리 금속으로 만든 신발은 출토되지 않고 있습니다.


만족도 조사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시나요?

평가:

※ 참고로 만족도조사에 제출하신 의견은 홈페이지 운영의 참고자료로 활용하며, 답변이 필요한 민원이나 문의글은 전화문의, 군민의소리 등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담당자
합천박물관 (☎ 055-930-4882)
최종수정일 :
2019.06.27 13:3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