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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토기는 보통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넓은 의미의 가야토기로서, 산화염(酸化焰)으로 소성(燒成)된 원시토기―우리나라 선사시대 토기인 빗살무늬토기와 무문토기―에 후속하는 기원전 1세기후반에서 6세기중엽―가야 멸망 무렵―까지의 적갈색연질토기(赤葛色軟質土器)에다, 섭씨 8~900도에서 환원염(還元焰)으로 소성된 와질토기(瓦質土器)와 회청색경질토기(灰靑色硬質土器)로도 불리는 섭씨 1000도 이상에서 소성된 도질토기(陶質土器)를 포함합니다.

다른 하나는 회청색경질토기(灰靑色硬質土器)로도 불리고, 흔히 가야·신라토기로도 불리는 도질토기에 한정하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엄격히 말하면 와질토기는 우리나라 고고학의 시기구분에서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적확히 표현하면 삼한시대(三韓時代) 후반대―의 지표적 토기이므로, 도질토기야말로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진정한 가야·신라토기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적갈색연질토기는 삼한시대와 삼국시대의 전기간에 걸쳐 생산되므로 시기를 구획하는데 유효한 자료라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가야토기를 대표하는 것은 도질토기이므로, 이를 중심으로 가야토기 본질에 접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가야토기, 혹은 가야·신라토기란 도질토기와 동시기(同時期)의 적갈색연질토기와 일상토기(日常土器)를 모두 포함하는 것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야토기의 등장

도질토기의 등장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도질토기는 와질토기가 제작될 때 함께 출현하였다는 견해, 혹은 와질토기에서 발전하였다는 견해, 또는 낙랑군의 멸망을 계기로 삼아 도질토기의 등장시기를 4세기 초로 간주하는 견해 등이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질토기 도질토기
두귀달린 항아리 짧은 목항아리 두귀달린 항아리 짧은 목항아리

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가야 유적의 조사 성과로 보는 한, 도질토기는 어깨 부위에 두 귀가 달린 짧은 목 항아리, 즉 양이부원저단경호(兩耳附圓底短頸壺)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 것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최초의 도질토기는 바로 양이부단경호(兩耳附短頸壺)의 형태로 나타나거나, 최초의 양이부단경호와 동시에 출현하기 때문입니다.

가야지역에서 발견된 양이부호의 조형이 될 만한 것은, 서진(西晉) 무렵에 중국 남방의 월주요자기(越州窯磁器)의 영향을 받아 중국 북방에서 생성된 양이부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금관가야의 지배자집단의 공동묘지인 김해 대성동고분군의 발굴조사에 의해 살펴볼 때, 이 양이부호는 순장(殉葬), 후장(厚葬) 등 북방유목민족의 습속, 즉 북방의「정신문화」와 유목민족의 특유한 청동솥인 「오르도스」형 동복(銅複), 각종의 기마용마구(騎馬用馬具), 괘갑(掛甲)·몽고발형주(蒙古鉢形·)와 같은 북방유목민족의 기마용갑주(騎馬用甲·) 등의 북방문물과 동시기에 영남지역, 특히 낙동강 하류역―금관가야―에 가장 먼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질토기는 이러한 북방유목민족의 습속·문물의 남하(南下)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도질토기와 순장 등이 한반도의 북부와 중부지역을 생략한 채, 중국 북방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한반도의 최남단(最南端), 낙동강 하류역에서 출현하고 있는 점, 더구나 북방의 물질문화뿐 만 아니라, 정신문화도 함께 동반하고 있는 점, 이러한 북방문화의 출현과 함께 영남지역에서 커다란 사회 변혁이 간취되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도질토기를 비롯한 북방문화는 이러한 문화를 지닌 특정 북방민족의 낙동강 하류역에로의 이주의 소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도질토기가 등장하는 시기는, 그 조형이 되는 중국 북방의 양이부호(兩耳附壺)가 서진대(西晋代)의 것이라는 점과 일본열도의 고고유물들과의 비교에 의하여 기원 280년대 전후일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양이부호로 상징되는 낙동강 하류역의 도질토기가 중국 북방의 토기문화의 영향에 의한 것이지만, 중국북방제(中國北方製)가 아닌, 가야 재지(在地)의 도공(陶工)에 의하여 만들어 진 것임을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가야토기는 처음부터 가야화하여 생성된 것입니다.

도질토기는 이와 같이 낙동강 하류역에 처음 등장하여 가야와 신라지역에 확산되어 가야·신라토기로 발전해 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도질토기의 등장은 단순한 토기의 문제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도질토기의 출현과 동시에 영남지역의 사회분위기가 뚜렷한 획을 그을 수 있을 정도로 달라진다는 점에서, 고고학에서는 변한에서 가야로의 전환, 크게는 삼한시대에서 삼국시대로의 전환을 알리는 가장 중요한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도질토기의 3단계

가야토기를 일목요연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도질토기의 변천에 대하여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야·신라토기는 전기(前期), 중기(中期), 후기(後期)의 3단계로 나누어집니다. 한마디로 전기는 가야침토기 중심단계, 중기는 가야식토기에서 신라식토기가 분화하여 가야식토기와 신라식토기의 2대 양식토기가 존재하는 단계, 후기는 가야의 신라에로의 병합―멸망―으로 신라식토기만 존재하는 시기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각 단계의 보다 구체적침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두껑있는 굽다리 접시 두껑있는 굽다리 접시
바리모양 그릇받침 바리모양 그릇받침
원통모양 그릇받침 원통모양 그릇받침

도질토기 전기

도질토기 발생―3세기 말―부터 5세기 초까지의 시기입니다. 이 단계는 앞 시기의 토기인 후기 와질토기의 가장 표식적인 토기인 노형기대(爐形器臺)가 와질(瓦質)·도질(陶質)의 상태로 존재하며, 최초의 도질토기로 나타났던 양이부원저단경호(兩耳附圓底短頸壺)도 이 단계의 가장 대표적인 토기의 하나입니다. 특히 이 단계의 후반대부터는 유개고배(有蓋高杯), 소형의 원저광구호(圓底廣口壺)와 기대(器臺), 발형기대(鉢形器臺)·통형기대(筒形器臺), 각종의 단경호(短頸壺)·중경호(中頸壺), 컵형토기 등 도질토기의 기종(器種)이 매우 다양해져 가야식토기가 완성됩니다. 이 시기에는 아직 신라식토기가 성립되지 않아 토기상으로는 신라의 「아이덴티티」가 확인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단계는 가야식토기 중심의 단계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 단계는 전형적인 신라식토기가 인정되지 않아, 연구자에 따라서는 이 시기의 영남지방의 토기를 가야·신라식의 2대양식토기가 인정되지 않는 「공통양식토기(共通樣式土器)」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도질토기 중기

5세기 전엽부터 가야가 신라에 완전히 흡수 병합되는 6세기 중엽까지의 시기입니다.
5세기 전엽에 처음으로 상하 엇갈린 투창(透窓)이 뚫린 2단대각(二段臺脚)의 고배, 원통형(圓筒形)의 목을 가진 긴 목 항아리(長頸壺)를 대표로 삼는 전형적인 신라식토기가 공통양식토기에서 분화하면서 성립함으로써, 가야식토기와 신라식토기의 2대양식토기가 병존하는 것이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긴목항아리 긴목항아리
긴목항아리 긴목항아리
굽다리접시 굽다리접시

이 단계에는 후기 와질토기의 전통인 노형기대와 도질토기 등장의 신호이자 전기 도질토기의 가장 상징적인 토기였던 양이부호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가야토기에서는 완성된 장경호(長頸壺)가 새로 등장하고 발형기대와 통형기대가 이 시기의 기대를 대표합니다. 신라식토기에서는, 5세기 중엽이 되면 뚜껑이 있는 유개고배(有蓋高杯)가 등장하고 대각이 붙는 대부장경호(臺附長頸壺)도 등장합니다.

도질토기 후기

신라식토기 신라식토기
가야제국이 신라에 병합된 6세기 중엽부터 신라가 삼국을 통합하는 7세기 중엽까지의 시기입니다. 가야의 멸망과 동시에 가야식토기는 완전히 사라지고 신라식토기의 계보를 잇는 토기가 확산되어 신라식토기 계보에 속하는 하나의 양식(樣式)의 토기만이 존재하는 시기입니다. 중기 도질토기(中期陶質土器)의 대표적인 토기들이었던 발형기대(鉢形器臺)와 통형기대(筒形器臺)가 사라지는 것도 이 시기 토기 구성상의 뚜렷한 특징의 하나입니다.
이 단계의 도질토기를 신라식토기의 하나의 양식으로 통일되었다는 뜻에서 일반적으로 「통일양식토기」라고 부릅니다.

토기에서 확인되는 가야사회의 재편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가야토기는 가야멸망 전까지인 도질토기 전기와 중기에만 존재합니다. 그런데 가야토기단계의 전기에서 중기로의 전환은 금관가야 왕들의 무덤인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축조 중단과 밀접한 관련을 가집니다. 말하자면 여러 다른 가야지역의 지배자집단의 무덤들은 가야 멸망 시기인 6세기 중엽까지 의연하게 축조가 계속되는데 반해, 유독 금관가야의 지배자집단의 무덤만은 발전 도중에 축조가 중단되는 것입니다. 대성동 고분군의 축조 중단과 거의 동시에 금관가야지역에 신라식토기가 출토되는 것은, 신라의 낙동강 하류역으로의 진출에 따른 금관가야의 급격한 쇠퇴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진정한 금관가야토기의 존속 기간은 전기(前期)의 시기에 한정됩니다. 또 신라가 명실상부한 영남(嶺南)의 강자로 등장하는 것은, 토기문화에서 확인되듯이 신라식토기가 성립하는 5세기 전엽의 일입니다.

한편 전기 가야연맹(前期加耶聯盟)의 맹주(盟主)인 금관가야의 일시적인 멸망―대성동 고분군의 축조 중단―에 따른 가야사회의 재편 모습을, 토기문화를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5세기 전엽에 경상북도 경주를 중심으로 성립하였던 신라식토기가 5세기 중엽에 일부 가야지역에도 정착하고 있음이 주목됩니다. 즉, 김해·부산의 낙동강 하류역, 창녕지역, 대구지역, 성주(星州)지역이 이러한 대표적인 지역들입니다. 이곳들은 원래는 가야연맹에 소속한 가야의 구성원들이었으나, 5세기의 어느 시점이후에 사실상 경주―신라―를 정점(頂點)으로 한 정치연합(政治聯合)에 편입된 지역임이 분명합니다. 말하자면 5세기 전엽에 신라의 급부상으로 인하여 기존의 가야연맹은 일차적으로 해체되고 가야제국(加耶諸國) 중 대체로 낙동강 동쪽에 위치한 국가들은 사실상 신라권역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이는 신라「식」토기―적확히는 신라「양식」토기―의 이 지역으로의 확산과 정착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신라양식이 분포하는 이러한 구(舊)가야지역―낙동강하류역·창녕·대구·성주 등이 신라에 완전히 복속되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들 지역에 신라토기양식내의 여러 토기형식, 즉 낙동강하류식·창녕식·대구식·성주식 토기들이 존재하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자치권은 인정된 것으로 보입니다.

창녕식 창녕식
김해식 김해식
아라가야식 아라가야식
대가야식 대가야식

한편 전기부터 존재하였던 함안(咸安)―아라가야―식 토기 외에 경상내륙의 고령(高靈)―대가야(大加耶)―식 토기가 5세기대부터 성립하여 가야지역의 또 하나의 새로운 강자, 대가야의 존재를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보듯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이는 532년 금관국(金官國)―금관가야―의 투항 기사는 새로운 관점에서의 해석이 필요합니다

가야토기와 스에끼

초기스에끼 초기스에끼
가야토기와 관련하여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일본 고분시대(古墳時代)―우리 나라 삼국시대에 상당―중기(中期)에 나타나는 「스에키」입니다. 이 「스에키」는 한마디로 말해 가야의 도질토기의 직접적인 영향에 의해 일본에서 생산된 일본판 도질토기입니다. 「스에키」가 일본에서 처음으로 출현하는 시기는, 신라양식토기의 성립 및 낙동강 하류역에서의 출현 시기와 일치합니다. 말하자면 신라의 팽창으로 인한 전기 가야연맹의 붕괴―대성동 고분군 축조 중단―의 산물이 「스에키」인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때 가야 도공(陶工)들이 일본열도에 이주(移住)하여 일본에서 재현한 가야식토기가 초기(初期)「스에키」입니다.

근년 일본 각지에서 이러한 초기「스에키」의 조사가 꽤 진전되고 있습니다. 주목되는 것은 초기「스에키」에 가야의 특정 지역의 도질토기만이 반영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야지역을 포함하여 전남(全南)의 영산강(榮山江)유역의 토기 요소까지 확인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5세기 전엽에 급부상한 신라의 압박에 의한 전기 가야연맹의 동요에 따라, 여러 가야지역의 주민들이 일본으로 대거 이주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앞으로 도질토기의 일본 재현인 「스에키」를 정밀하게 분석하여, 가야 이주민―일본에서는 도래인(渡來人)으로 부른다―들이 일본열도에서 무슨 역할을 하였는가를 정확히 규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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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06.27 13:1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