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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가야의 성립기반과 발전

4세기 중엽 이후 가야 여러 나라들 가운데에서 대가야가 점차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5세기 후반 경에는 가장 두드러진 세력으로서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처럼 대가야가 성장하게 된 바탕과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이제까지 학계에서는 김해 금관국에서 고령 대가야로 주도권이 넘어가게 된 배경을 400년에 있었던 고구려군의 낙동강 유역 진출로 설명해 왔습니다. 즉 고구려군에 격파된 김해세력은 그 후 쇠퇴하게 되고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고령을 중심으로 하는 내륙의 가야세력이 후기가야를 주도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사회 진화의 한 원동력으로서 큰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는 만큼, 전쟁 이후 김해의 가야세력이 급격히 쇠퇴하였다고 보는 시각이 반드시 옳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특히 김해 대성동 고분군 발굴 결과 보이는 김해 가야세력은 5세기 전반대까지는 여전히 강력한 가야국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령 대가야의 성장 요인도 다른 쪽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옥전고분군 옥전고분군
고령 지산동고분군 고령 지산동고분군

대가야가 발전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은 4세기 대에 있었던 어느 한 사건이었습니다. 『일본서기』 신공기 49년 기사에 가라(加羅), 즉 대가야의 존재가 보이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원래 3세기 전반대의 것으로 되어 있으나 2주갑(120년)을 내려 4세기 후반 대의 사실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여기에 보이는 일련의 가야관계기사는 가야와 백제, 왜가 모두 관련된 것입니다.

왜가 한반도에 교섭을 하려고 하는 목적은 쇠(鐵)을 비롯한 선진문물의 도입이었습니다. 철은 주로 가야를 통해서 수입해 갔고, 그 외의 선진문물은 가야, 백제를 비롯하여 중국 군현과 본토로부터였습니다. 그런데 고구려의 낙랑, 대방고지의 장악으로 인해 중국과의 통교가 차단되어 선진문물의 구입처를 전통적 우호국인 가야와 백제로 한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방의 옛 땅은 오늘날의 황해도 일대입니다. 이 지역이 고구려의 관할권 아래로 들어가자 한성(오늘날 서울 일대) 백제의 대외 해로는 고구려에 의해 심각한 방해를 받았습니다. 서해안의 해류는 힘들이지 않고 전라도 지역 해안까지 남하할 수 있어 대방 땅을 장악한 고구려는 백제 해안의 상당 부분을 장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고령지역은 남해안에서 낙동강을 이용해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는 지역입니다. 그리고 고령은 거창, 함양 등의 내륙지역과 통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소백산맥을 넘어 무주, 장수, 임실, 남원 등으로도 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북으로는 성주, 김천을 거쳐, 추풍령을 넘어 황간, 영동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역입니다. 동으로는 낙동강을 건너 곧 바로 대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고령지역의 이러한 지리적 이점이 곧 5세기 이후 가야에서 가장 강력한 지역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기반이었습니다.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교역을 원활하게 할 수 있었고, 뿐만 아니라 백제 등을 통한 선진 문물의 흡수도 다른 가야국들에 비해 빨랐습니다. 대가야의 주요 교역품은 합천 야로지역에서 생산되는 쇠와 안정된 농업기반을 바탕으로 생산된 농산물이었습니다.

즉 대가야가 가야 후기 강력한 국가로 성장 할 수 있었던 기반은 유리한 교역로의 확보를 통한 철의 수출과 안정된 농업기반에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외부로부터 그러한 것을 지킬 수 있었던 강력한 방어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지산리고분군과 같은 대형 고총고분군은 대가야의 발전상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가야는 자체 발전을 바탕으로 주변 가야지역으로의 진출도 단행하였습니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대가야는 6세기 초에 기문(己汶=남원·임실)과 대사(帶沙=하동) 지방을 둘러싸고 백제와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기문지역은 백제에 빼앗기고 말았지만, 대사지역을 계속 지켜 왜와의 교역 창구로 사용했습니다. 이는 이 시기 대가야가 주변의 합천, 거창, 함양, 산청지역뿐만 아니라 섬진강 지역까지 진출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토기를 비롯한 고고학적 양상들은 대가야가 5세기 중엽에 황강 유역 및 남강 상류역을 포괄하는 연맹체의 맹주국이 되었고, 5세기말에는 그 대부분 지역을 간접 지배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

한편 후기 가야연맹은 북쪽의 대가야와 남쪽의 안라국을 중심으로 한 남북 이원체제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안라국 또한 후기 가야 여러 나라들을 주도하는 가야국으로 성장하였으며, 바다 건너 왜국과도 활발한 교류를 행하였습니다. 529년에는 ‘안라 고당회의’를 주도하는 등 가야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후기가야의 멸망

대가야는 562년 신라 장군 이사부가 이끄는 신라군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15세의 소년 장수 사다함은 5,000명의 선봉대로서 기습작전을 감행하여 대가야를 단숨에 멸망시켰습니다. 그러나 대가야의 멸망은 그 이전부터 서서히 그 조짐이 보이고 있었습니다. 대가야의 궁중 악사였던 우륵이 551년(신라 진흥왕 12년) 이전의 어느 시기에 신라에 투항해 간 일 등을 통해 보아 짐작할 수 있습니다.

532년에는 김해의 금관국(남가라)이 신라에 항복하였으며, 540년대까지는 낙동강 동쪽의 가야세력 대부분이 신라에 복속됩니다. 4세기 후반 이후 지속적으로 가야와 우호적 관계를 지속하고 있던 백제는 신라의 가야 잠식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항하기 어려웠습니다. 그것은 북쪽 고구려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백제와 신라는 당시 고구려에 대한 방어를 위해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551년 이 두 동맹국은 힘을 합해 당시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공격하여 빼앗았습니다. 이때 대가야와 주요한 가야세력도 함께 참가했습니다. 공격에 성공하여 백제는 한강 하류지역을 차지하고, 신라는 상류지역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가야가 어떤 활약을 했는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후인 553년에 신라는 동맹국인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하류지역을 탈취했습니다. 한강 하류지역은 백제로서는 양보할 수 없는 지역이었기에, 이듬해(554년) 가야군과 왜군을 동원하여 신라의 관산성(管山城) 공격에 나섰습니다. 이 전쟁의 장소는 충북 옥천지역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한강 하류지역과 가야지역에 대한 패권을 다투는 일대 결전이었습니다.

전쟁 초기의 상황은 공격을 개시한 백제 측이 유리하였으나 신라의 전선을 깨뜨리고 깊숙이 쳐들어간 왕자 여창(餘昌)을 위문하려고 백제 성왕이 찾아가다가 신라의 복병에게 시해되자 백제, 가야연합군은 단번에 무너졌고, 결국 백제는 신라에게 또 다시 크게 패했습니다. 그런데 백제가 이러한 시련을 겪고 있는 틈을 타 이번에는 고구려가 백제 웅천성을 침범해 왔습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을 잘 방어해 냈습니다. 이로 보아 전쟁의 결과는 백제에게 타격을 주긴 하였으나, 치명적이었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반면 대가야를 위시한 가야 측의 피해는 매우 컸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후 대가야는 점차 쇠망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6세기 중엽 이후 신라는 가야제국 에 대한 병합에 착수했습니다. 560년 무렵 함안의 안라국이 먼저 신라에 병합된 듯합니다. 왜냐하면 안라를 대표로 하는 가야 남부지역은 상당히 오랫동안 대왜교역의 중심지였는데, 신라가 이때부터 왜에 사신을 보내기도 하고, 한편으로 함안지역에 성을 쌓아 왜에 대비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안라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멸망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신라의 강압과 회유에 안라가 별다른 저항 없이 이에 응함으로써 병합된 것으로 추정할 뿐입니다. 실상 안라의 내부에는 친신라적 인물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 『일본서기』의 기록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백제로부터 직접적 연관이 끊긴 상태에서 안라가 비교적 쉽게 신라에 투항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 북부지역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대가야는 왜나 백제와의 교역도 중요한 존재기반이었지만, 자체의 제철능력이나 안정적인 농업기반이 뒷받침되는 나라였습니다. 말기에는 백제 측의 문물을 수용하면서 자발적으로 친백제적인 성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에 대해 좀 더 독립적인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대가야가 허물어지지 않는 한 그 주변의 가야들도 쉽사리 신라에 투항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라 진흥왕이 재위 22년(561년)에 낙동강 동쪽지역의 요충지인창녕에 중앙 정계의 최고 귀족들과 지방 통치의 담당자들인 사방군주들을 모이게 했습니다. 대대적인 모임이었습니다. 이는 이미 복속한 가야지역에 대한 지배를 원활히 하고, 낙동강 서쪽 가야지역으로의 진출을 도모하기 위한 일종의 군사시위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창녕 신라 진흥왕척경비」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일종의 군사작전회의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모임이 있고 난 1년 후, 대가야는 이사부가 이끄는 신라군의 전격적인 침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대가야가 어떠한 선제 군사행위를 취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사다함의 5,000 기병이 대가야 수도까지 먼저 쳐들어갔습니다. 신라 측 기록에 의하면 진흥왕이 이사부에게 대가야를 습격케 하였으며, 대가야 사람들은 ‘뜻밖에 신라 군대가 갑자기 쳐들어오므로 너무 놀라서 막을 수가 없었다.' 고 하고 있습니다. 대가야는 신라 대군의 기습공격에 의해 562년에 멸망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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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08.26 15:07: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