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번역시스템을 이용하여 자동 번역중입니다. 번역이 정확하지 않을 경우가 있습니다.
It is under automatic translation using Google translation system. The result may not be accurate.



농업

김해 농소리 패총에서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에서 벼의 흔적이 확인된 적도 있지만, 가야지역에서 보다 적극적인 농경이 확인되는 것은 청동기시대부터입니다. 최근에 발굴 조사된 진주 남강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에서 가야시대까지 경작되었던 밭이 무려 10,000 여 평 이상이나 확인되었습니다. 보리/밀/조/수수/기장/팥/녹두 등과 같은 밭작물들이 출토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밭작물의 대부분은 이미 가야시대에 재배되고 있었습니다.

회현리 패총 회현리 패총
진주옥방밭유적 진주옥방밭유적

논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마을 유적에서는 쌀이나 벼의 흔적도 확인되었습니다. 3세기 후반에 편찬된 『삼국지』가 토지가 비옥해서 오곡과 쌀을 재배하기에 알맞았다는 것이 입증된 셈입니다. 김해 회현리 패총에서 출토된 다량의 탄화미는 기원후에 김해의 가락국에서 쌀농사가 행해졌음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물론 어느 종류의 곡물이 어느 정도 생산되었고, 가야의 모든 사람들이 쌀을 먹을 수 있었는지 어떤지 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김해 부원동 유적에서 확인된 가야의 집터에는 부뚜막이 설치되어 있었고, 곡물을 삶을 수 있는 시루도 출토되었습니다. 가야인은 곡물을 조리해 먹고 있었던 겁니다. 『삼국지』는 가야인 들이 집 서쪽에 부뚜막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김해이외의 가야에서도 곡물을 주식으로 했던 겁니다. 김해 부원동 유적에서는 탄화된 쌀/보리/밀/조/팥과 함께 복숭아/머루와 소/멧돼지/사슴 뼈, 그리고 30 여종의 조개껍질이 출토되었습니다. 현대와 별로 다를 것 없었던 가야인의 식량생산과 식생활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로

가야 유적에서 가락바퀴만큼 빈번히 출토되는 유물이 어로용구입니다. 각종의 낚시바늘은 신석기시대부터 확인되고 있으며, 지금까지 출토된 그물추는 그 수효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가야사는 남해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남해에 인접한 전기 가야의 모든 지역에 수많은 패총 유적이 존재하는 것은 가야인의 어로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고, 주된 식량의 원천을 바다에서 획득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물추 그물추
낚시바늘 낚시바늘
지산동출토 생선뼈 지산동출토 생선뼈

부산 동삼동/동래 패총, 김해 수가리/농소리/범방/예안리/부원동/회현리/대성동 패총, 창원 성산 패총, 고성 동외동 패총, 통영 욕지도/연대도 패총 등에서 출토되는 엄청난 양의 조개껍질과 생선뼈들은 가야의 어로 활동 을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마을 앞에 펼쳐진 갯벌에서 40여 종에 달하는 조개를 채집했고, 근해에서는 다랑어/참돔/정어리/가오리/상어 등과 고래를 잡았습니다.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출토된 다량의 고래 뼈에서 울산 반구대에 수없이 그려진 고래와 포획 장면의 바위그림에서 보이는 것 같은 가야의 어로 활동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남해안의 패총에서 발견되는 조개와 생선뼈는 자체에서 소비된 증거지만,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바다고둥이나 청어/대구와 같은 생선뼈는 해안의 남부가야와 내륙의 북부가야 사이에 유통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방직

방추차 방추차
『삼국지』에 따르면 가야에서는 실크와 폭이 넓고 섬세한 포가 생산되었습니다. 실크의 생산을 위해 일찍부터 누에치기도 했다고 전합니다. 누에를 기르기 위해 뽕나무가 심어졌을 것입니다. 신라시대에 청주 어느 마을의 인구와 재산상태를 기록한 촌락문서에는 뽕나무의 증감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누에를 칠 수 있는 뽕나무는 중요한 재산이었습니다. 누에를 치고 실크를 생산했던 가야에서도 뽕나무는 재배되었을 겁니다. 폭이 넓고 섬세하게 짠 직물도 생산되었습니다. 직물을 만드는 실은 삼나무에서 얻어졌고, 실을 빼고 직물을 짜는 방직기술이 있었습니다.

『삼국지』가 가야의 직물을 폭이 넓고 섬세한 것으로 특별히 기술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가야의 방직기술이 발달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삼한 소국의 군장이었던 염사치는 변한포 15,000필을 거두어 낙랑군으로 갔습니다. 변한포는 가야포입니다. 가야에서 상당량의 직물이 생산된 것을 전해 주는 기록입니다. 『삼국지』에서 가야인의 의복이 청결했다고 전하는 것도 이와 관련되는 대목일 겁니다. 잘 썩는 특징 때문에 가야의 면포가 유물로 남아있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누에와 삼나무에서 실을 뽑던 가락바퀴는 가야의 모든 집터와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습니다.

철생산과 유통

송풍구 송풍구
집게와 망치 집게와 망치

『삼국지』는 가야에서 많은 철이 생산되어 삼한과 낙랑군·대방군,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까지 수출되었다고 합니다. 가락국을 비롯한 가야는 철의 왕국이었습니다. 3세기까지 김해와 경주에서 출토되는 철기는 가야고분이 신라고분을 능가하고 있습니다. 가야에서 생산된 철제품은 김해·동래·함안·고령·합천 등의 가야고분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가야에서 수출된 철은 신라와 일본의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습니다.

가야에서 생산된 철은 화폐와 같이 쓰였습니다. 가야고분에서 출토되는 판상철부와 철정은 일정한 규격으로 만들어져 교환에 사용되었고, 수출되어서는 여러 철기를 만드는 소재로 활용되었습니다. 가야 철 생산의 대표였던 김해에서 지금도 철이 생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동면의 상동광산은 1950년대까지 조업했고, 조선시대에는 많은 철을 공납하고 있었습니다. 또 김해시 생림면에는 생철리-철이 나는 마을이라는 지명도 있고, 근년까지 쇠부리를 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가야의 제철 유적이 어떻게 확인되는가 일 것입니다. 최근에 김해 봉황대 유적에서 제철에 사용된 송풍구 파편과 쇠똥(slag)이 출토되었습니다. 송풍구는 용광로에 꽂아 바람을 넣는 토제관으로, 강한 불에 타 까맣게 변질된 모습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쇠똥은 제철할 때 나오는 쇳물의 찌꺼기가 굳은 것입니다. 김해 대성동 고분 2호와 김해 장유 덕정 유적에서는 철기 제작에 사용했던 철집게도 출토되었습니다. 도끼 모양의 판상철부는 김해 양동 162호분을 비롯한 가야고분에서 다량 출토되고 있으며, 덩이쇠인 철정은 김해 대성동과 동래 복천동 고분군과 같은 가야 고분에서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습니다. 가야제국이 일찍이 성장할 수 있었던 중요한 경제적 배경의 하나가 바로 철 생산이었던 겁니다.

토기생산과 유통

소가야토기 소가야토기
함안토기 함안토기
대가야토기 대가야토기
금관가야토기 금관가야토기

1,200도에 가까운 고온의 불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철 생산과 세트를 이루는 것이 가야토기의 생산이었습니다.

가야토기는 지역에 따라 특별한 양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김해의 가락국, 함안의 안라국, 고령의 대가야국, 창녕의 비지국, 고성의 고자국 등의 가야제국은 독특한 가야토기를 생산하였고, 이러한 토기들은 가야문화권 내에서는 물론 신라와 일본에까지 수출되었습니다. 함안 스타일의 가야토기는 부산 동래의 복천동 고분군과 경주의 월성로 유적, 그리고 일본의 오사카 지역까지 확산되었습니다.

대가야스타일의 토기는 서부경남의 전역을 뒤덮고, 일본열도의 곳곳에도 그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최근에 발견된 함안 가야읍의 장명동 도요지는 토기를 생산하고 수출하던 가야토기의 공장단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진행될 발굴 조사에서 가야토기 수출공단의 면모가 밝혀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각기 다른 양식의 가야토기는 가야제국 내에서는 물론 신라와 일본과 같은 외국에 수출되었고, 다른 물품들과 교환되었습니다.

수공업

숫돌 숫돌
목걸이와 구슬 목걸이와 구슬

『삼국지』는 가야인 들이 금·은보다 옥이나 구슬을 더 좋아했다고 전합니다. 실제로 김해·고령·함안·고성 등의 가야고분에서는 아주 찬란한 옥과 구슬의 장신구들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수공제품의 유통이 가야의 철이나 토기와 같이 명료하지는 않지만, 상당한 노력과 특별한 기술을 가진 전문가 집단이 존재했음은 분명합니다. 옥이나 구슬의 원석을 채집하고 연마하는데는 특별한 기술과 많은 노력이 요구되었습니다.

가야 고분에서 흔히 발견되는 옥과 구슬의 예를 봐도 그렇습니다. 철기가 아닌 나무로 옥과 구슬의 구멍을 뚫었고, 벚나무와 사슴가죽으로 연마된 것입니다. 나무로 옥을 뚫고 사슴가죽으로 구슬을 연마하는데 걸렸을 시간을 생각해 보세요. 가야의 수공업기술의 수준은 물론 옥과 구슬의 가공에만 매달려야 했던 전문집단과 그들을 먹일 수 있는 경제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족도 조사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시나요?

평가:

※ 만족도조사에 제출하신 의견은 홈페이지 운영의 참고자료로 활용하며, 답변이 필요한 민원이나 문의글은 전화문의, 군민의소리 등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담당자
합천박물관 (☎ 055-930-4882)
최종수정일 :
2019.08.26 16:4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