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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지역의 사상에 대해서는, 김해에 전해지는 파사 석탑(婆娑石塔) 및 수로왕릉 안의 쌍어문(雙魚文)과 관련하여, 인도 지역의 남방 불교가 이곳에 직접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중국 북방 불교를 수용한 것으로 알려진 한국 불교사에서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파사 석탑은 서기 48년 김해 가락국 건국 초기에 허왕후가 아유타국에서 배를 타고 올 때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여 싣고 왔다는 석탑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직 불교로서 이해되지 못하였고, 서기 452년에 호계사(虎溪寺)를 창건하여 파사 석탑을 안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해에 질지왕은 왕후사를 창건하여 허왕후의 명복을 빌었다고 합니다. 또한 수로왕릉 안의 납릉정문(納陵正門) 공포(·包)에 새겨진 쌍어문(雙魚文)은 불교가 매우 성행하였던 인도 아요디아 시의 문장(紋章)으로서, 허왕후 때부터 전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적인 증거가 미약한 형편입니다.
신라는 눌지 마립간(417~458) 때 고구려에서 묵호자가 와서 포교를 하였다고 하니, 452년 당시에 신라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금관국에도 불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때의 불교는 남방 불교가 아니라 북방 불교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당시에 남방 불교, 또는 북방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하더라도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있었다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한편 가야의 멸망을 전후한 시기에는 여러 모로 가야 사회에 불교가 수용되었을 정황이 충분합니다. 우선 고령 대가야의 성문을 ‘전단문(·檀門)’이라고 하는바, 그 `전단`은 불경에 자주 나오는 향나무의 일종입니다. 둘째로 고령 고아동 벽화고분의 천정에 그려져 있는 연화문(蓮花文)은 부여 능산리 벽화고분과 상통한 양식의 것이며, 이는 대가야가 불교를 이해하고 있었다는 방증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셋째로 대가야 시조인 이진아시왕(伊珍阿·王)의 어머니 이름이 불교의 팔정도(八正道)의 하나인 ‘정견(正見)’이고 대가야의 마지막 왕인 도설지왕(道設智王)의 별명이 불경에 나오는 ‘월광태자(月光太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토대로 삼아 좀더 적극적으로 추정해 본다면, 마지막 시기의 대가야는 불교를 잘 알고 있었으며, 약화된 왕권을 다시 세우는 명분으로 이를 이용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이는 모두 실패하였으나, 이 때 성립된 대가야 마지막 시기의 불교문화는 훗날 합천 가야산에 해인사(海印寺)가 세워지는 인연으로 작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