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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나라들은 통일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대외교섭의 주체나 창구도 하나는 아니었고, 복잡한 대외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야제국은 문화적으로 서로 비슷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독립적이었습니다.
먼저 가야의 나라들 사이에 교섭이 있었을 겁니다. 그 다음에 삼국·중국·일본 등과의 교섭을 살펴야 합니다. 외국과의 관계도 단순치는 않습니다. 백제와의 외교와 같이 가야제국이 함께 교섭을 진행했던 예도 있지만, 수로왕과 신라의 외교와 같이 가락국(김해)이란 한 나라의 교섭이었던 경우도 있습니다. 가야의 대외관계는 전쟁과 외교로 진행되었습니다. 가야의 대외관계를 연대순으로 훑어봅니다.

선사시대

진주옥방환호 가야의 각 지역에서 정치체가 등장한 것은 약 2,000년 전쯤이었습니다. 그러나 훨씬 이전에도 대한해협을 건너는 교류가 있었습니다. 무려 4,500~3,000년 전의 김해 수가리 조개무지, 부산 동삼동 조개무지, 통영 연대도 조개무지 등은 일본열도와 교류를 가졌던 신석기문화인들의 마을을 보여 줍니다.

산청 옥산리환호 산청 옥산리환호
진주 옥방환호 진주 옥방환호

빗살무늬토기는 큐슈에서 토기 발생에 영향을 미쳤고, 흑요석이라는 큐슈의 화산암은 수입되어 화살촉으로 가공되었습니다. 약 3,000~2,200년 전의 청동기시대가 되면, 교류의 증거는 보다 확실해 집니다. 큐슈 북부에서는 우리의 무문토기와 세형동검이 출토됩니다.

최초의 금속기인 청동기는 물론 쌀농사까지 전파되었습니다. 물론 쌀농사가 혼자 바다를 건넌 것은 아니겠지요. 큐슈북부에 도착한 청동기문화인들은 고인돌로 무덤을 만들고, 마을까지 똑 같은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울산 검단리와 진주 남강 유적 등에서 발견되는 환호 마을은 큐슈북부의 여러 지역에서도 등장했습니다. 환호 마을이란 동물이나 사람이 접근하기 어렵게 도랑으로 마을 전체를 두른 유적을 말합니다. 일본 사가현 요시노가리 유적은 남해안지역의 환호마을을 송두리째 옮겨 놓은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할 정도입니다.

가야와 낙랑군

낙랑기와 낙랑기와
낙랑벽돌 낙랑벽돌
청동거울 청동거울

가야의 여러 나라가 처음 등장했던 것은 남해안지역입니다. 남해안에서 가야의 소국들이 먼저 성립했던 것은 바닷길을 통해 철기를 비롯한 선진문물이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108년에 한(漢)은 위만조선을 멸하고 한사군을 설치했습니다. 남해안지역과 낙랑군의 교류는 가야사의 시작을 보장하였습니다. 『삼국지』는 한(韓)의 소국들이 계절마다 낙랑군에 왕래하여 인장과 의관을 받은 자가 천 여 명이나 되었다 합니다. 가야 소국의 군장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겁니다. 진한의 군장이었던 염사치는 변한포(弁韓布) 15,000필을 낙랑군에 가져갔습니다. 변한은 가야입니다. 등장기의 가야가 낙랑군과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증거가 됩니다.

수로왕과 신라

『삼국사기』는 102년 8월로 전합니다만, 가락국의 수로왕은 경주에 갔습니다. 사로국(신라)의 동북쪽에서 일어난 국경분쟁을 조정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로국은 국경 분쟁을 스스로 해결치 못해 연로한 수로왕에게 중재를 부탁했습니다. 국경 분쟁을 조정한 수로왕을 위해 연회가 베풀어졌습니다만, 한기부의 촌장이 참가치 않았습니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수로왕은 노비를 시켜 그 촌장을 죽이고 가락국으로 돌아 왔습니다. 가락국은 532년에 신라에게 통합됩니다만, 초기에는 경주의 사로국 보다 훨씬 강력한 세력이었습니다. 이러한 김해 가락국과 경주 사로국 사이의 우열관계는 400년경부터 신라가 고구려를 등에 업기까지 지속되었을 것입니다.

해상왕국

화천 화천
화천3세기 후반에 편찬된 『삼국지』는 가락국을 비롯한 가야의 해상왕국적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황해도의 대방군에서 일본열도로 가는 바닷길의 중심에 김해의 가야국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김해·마산·고성 등의 가야는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고대 동아시아의 중개무역항이었습니다.
김해·창원·고성 등의 가야고분에서 출토되는 중국과 일본의 문물은 이런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김해 회현리 조개무지에서는 화천(왕망전)이라는 화폐가 출토되었습니다. 화천은 10년여 밖에 사용되지 못한 화폐이지만, 평양과 일본열도에서도 출토되고 있습니다.

3세기경에 황해도에서 일본열도를 왕복하는 데는 2년 반 정도가 걸렸답니다. 한번 왕복하는데 2년 이상이 걸렸던 바닷길의 곳곳에 10년 밖에 통용되지 않은 화폐가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바닷길의 왕래가 얼마나 빈번했던 가를 보여줍니다. 김해를 비롯한 가야국은 가까운 마한과 진한은 물론, 멀게는 대방군과 일본열도로 철을 수출했습니다. 가야에서 생산된 철과 중국·일본의 문물이 교환되었고, 가야의 여러 나라는 이를 바탕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가야국들의 전쟁

바로 이러한 해상교역권에 대한 쟁탈전이 ‘포상팔국의 난’이었습니다. 창원·마산·고성 등의 포상팔국은 김해 가락국의 주도권에 도전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209~212년까지 전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포상팔국을 물리치지 못한 가락국은 신라에 구원을 요청했고, 포상팔국의 군대는 해로로 울산까지 진출했습니다. 남해안에서 벌어진 최초의 해전으로도 중요하지만, 가야국들이 서로 전쟁을 벌였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가락국의 건국신화에 보이는 형제와 같은 사이는 이미 아니었습니다. 문화적으로는 비슷하더라도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서는 전쟁도 불사해야 했던 관계였던 것입니다.

고구려와의 전쟁

313년에 고구려는 서북한에서 중국을 내쫓았습니다. 한민족으로서는 반가운 일이지만, 남해의 가야국들에게는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중국의 선진문물이 더 이상 공급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가야문화의 중심은 북부내륙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보다 결정적인 계기는 400년에 광개토왕이 파견한 5만의 고구려 군이었을 겁니다. 가야와 왜의 연합군에게 침략 받던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했고, 고구려는 ‘임나가라’(김해· 고령·)의 성을 빼앗고, ‘안라(함안)군’을 격파했습니다. 이제 남부의 가야는 쇠약해졌고, 고구려를 등에 업은 신라는 남부가야로의 진출을 꾀하게 됩니다.

신라 구원전

481년에 대가야는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구원하는 전쟁에 나서게 됩니다. 대가야는 지금의 흥해에서 고구려와 말갈의 군대를 격파했습니다. 이러한 대가야의 움직임을 백제의 부용으로 보려는 생각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볼만한 적극적인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시기에는 신라와 백제가 결혼동맹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대가야가 자발적으로 신라와 백제의 편에 서서 고구려에 대항함으로써 한반도 세력강 균형과 자국의 독립을 유지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해야할 겁니다.

가락국의 쇠퇴

496년에 김해의 가락국은 신라에 흰 꿩을 보냈습니다. 화친의 표시였습니다. 부산 동래 복천동 고분군에서는 5세기를 경계로 가야에서 신라의 문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제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 없이도 낙동강 서쪽의 가야를 위협하게 되었습니다. 신라의 진출에 직면했던 가락국은 화친제의로 휜 꿩을 신라에 보냈던 겁니다. 전기가야의 중심세력이었던 가락국의 쇠퇴를 말해주는 기록입니다. 김해지역에서는 수없이 많은 가야고분이 조사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령·창녕· 함안에서 보는 대규모의 봉토분은 없습니다. 이를 고총(高塚)이라고도 합니다만, 가야 지역에서는 5세기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김해에 이러한 고분이 없다는 것은 고총을 만들기 시작한 단계에는 이미 가락국이 그럴만한 실력을 잃고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532년에 신라에 투항한 것은 가락국 멸망의 마지막 절차에 불과했습니다.

결혼동맹

화동 섬진강 화동 섬진강
남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려 하자, 대가야는 522년에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었습니다. 왕실간의 결혼을 통해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려 했을 겁니다. 대가야왕과 신라왕녀는 왕자도 낳게 되었습니다만, 양국의 동맹관계는 529년에 결렬됩니다.
529년은 서쪽의 백제가 섬진강을 따라 남하하여 다사(하동)를 석권한 해입니다. 백제가 하동까지 진출하게 되자, 대가야는 서쪽과 동쪽의 백제와 신라를 동시에 상대해야 했습니다.
신라가 흔들리는 대가야와 동맹관계를 지속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통한 대가야와 신라의 동맹관계는 파탄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안라국의 외교

신라가 김해와 창원 지역을 석권하자 제일 먼저 불안을 느낀 것은 함안의 안라국이었습니다. 6세기 전반에 안라국왕은 대가야 등의 가야제국과 공동 외교를 전개하였습니다. 왜국에서 파견된 임나일본부=왜의 사신들을 함안에 주재시키면서 왜의 세력을 이용하려 했고, 신라의 침략에는 친백제외교로, 백제의 진출에는 친신라외교를 통해 신라와 백제를 견제하면서, 가야의 독립을 유지해 보려 했습니다. 이러한 가야의 외교는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그러나 외교는 외교일 뿐이고, 국력이 모자라면 나라를 잃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554년에 대가야는 백제와 함께 관산성(옥천)에서 신라와의 전투에 참가했습니다만, 백제와 함께 참패를 경험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이 전쟁에서 백제와 대가야는 무려 40,000여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었습니다. 백제의 타격도 컸겠지만, 대가야는 이때의 충격 때문에 8년 뒤인 562년에 신라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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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박물관 (☎ 055-930-4882)
최종수정일 :
2019.09.30 11: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