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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과 통교한 왜국은 32국이 있고, 국의 규모는 1천호~7만호이다. 나라마다 왕을 칭하여 세세로 전하였는데, 대왜왕은 야마대국에 있다.
  • 2세기 후반 대란이 있었는데, 비미호라는 여왕을 세움으로써 안정을 되찾았다. 야마대국을 다스리는 비미호는 귀도(鬼道)를 숭배했다.
  • 비미호는 위에 조공을 보내 친위왜왕(親魏倭王)의 위호를 받았다(239년).
  • 이후 구노국의 도전을 받았고, 그녀가 죽은 후 남자왕이 추대되었으나 국내가 혼란해졌다. 이에 비미호의 종녀인 13세의 왜 여왕 일여가 추대됨으로써 안정을 되찾았다(266년 서진과의 교섭을 끝으로 413년까지 중국과 통교는 보이지 않음).
  • 야마대국은 각 국의 교역에 대왜(大倭)를 시켜 감시하게 하고, 특히 북쪽 여러 나라의 외국과의 원거리교역은 이도국에 대솔(大率)을 설치하여 감찰하였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왜의 맹주국인 야마대국이 호수가 7만으로 전하는 등 상당한 규모라는 점입니다. 또 야마대국내 ‘대왜왕’의 존재는 맹주국을 상징하는 것인데, 이 맹주권은 주로 대외교역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2세기 후반에 일어났다는 대란은 군현의 쇠퇴에 따라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결과인데, 이것을 수습하고 나선 비미호는 종교적 권위로서 분열된 왜제국을 통합했던 것입니다.
이같은 종교적 권위는 군현과의 통교를 통해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66년 이후 중국과의 통교가 단절되는데, 군현의 쇠퇴 및 서진과의 통교가 삼국에 의해 차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왜의 대외교역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전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방제경 방제경
중광형동모 중광형동모
파형동기 파형동기

이상의 기록은 초기가야의 사실을 전하는 『삼국지』위서 동이전 변한조와는 많은 비교가 됩니다. 먼저 호수를 보면, 야마대국은 7만호로서 한의 최대인 마한의 대국 1만여 호보다 훨씬 많습니다. 또한 야마대국에는 궁실과 성책(城柵), 법률, 군사가 존재하고, 비미호의 무덤은 반경이 백여 보(步)이고 순장된 노비가 백여 인이나 된다고 하였습니다. 3세기 중반의 견문으로서 어느 정도의 과장이 있었음은 감안되어야겠지만, 야마대국이 대외교역을 중심으로 왜제국의 구심체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반면 변한 12국의 구심체인 김해의 구야국은 어떠할까요. 국의 규모도 적고, 야마대국과 같은 구체적인 활동도 전하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대외활동과 관련하여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 왜와 분명히 비교되는 점입니다.

첫째, 이미 1세기 초반에 염사치와 같이 중국어에 능통한 인물이 등장하여 군현과 직접 왕래하여 선진문물을 획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같은 예는 왜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양상인데, 왜국이 이도국 등을 중심으로 활발한 대외교역을 전개했다고는 하지만 왜가 군현에 직접 간 것이 아니라 군현사가 온 것은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둘째, 김해 구야국은 철이라는 풍부한 필수자원을 가지고서, 대외교역활동을 영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당시 철은 사회발전의 척도가 되는 대단히 중요한 자원이었는데, 왜가 이것을 구야국에 의존하였다는 것은 양 지역의 문화적 종속관계를 시사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고고자료상으로도 확인되는데, 1~3세기 청동기, 철기 등 금속기와 환호집락은 모두 가야지역에서 건너간 것입니다. 또한 소형방제경, 중광형동모, 그리고 야요이식토기는 양 지역에서 공유하는 것인데, 이때의 가야의 교섭국은 북큐슈의 야마대국이었을 것입니다.

한편 문헌에 보이는 문신, 성책(토성), 목관 등도 양 지역의 실물자료로서 확인되고 있는데, 야요이 시기의 이 같은 현상을 가야로부터의 문화 전래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같은 점에서 볼 때, 왜인전에 대중(對中)교섭의 중간기착지로서 구야국을 말하는 것이나 ‘독로국과 왜가 접한다’라고 표현된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즉 이것은 양국이 문화전파와 수용이라는 밀접성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삼국사기에 보이는 왜의 출몰기사도 왜의 이같은 문화적, 경제적 종속성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왜에서는 4세기 이후 고총고분이 발생하는데, 기나이(畿內;나라, 오오사카, 와카야마) 야마토(大和)정권의 중심묘제로 자리잡게 됩니다. 고분시대의 시작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5세기가 되면 일본열도 각지의 유력 수장묘로 자리잡으면서 절정기를 맞습니다. 이제까지 왜를 대표했던 북큐슈의 야마대국은 더 이상 존속하지 않고, 기내를 중심으로 전방후원분을 축조하는 새로운 정치권력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야마토 정권은 고대국가체제를 갖춘 것은 아니며, 지방 수장층에 대한 제어력이 극히 미약한 수장연립정권입니다.

4~5세기 이후의 가야의 대왜교섭의 대상도 기나이로 바뀌게 되는데, 양자가 공유하는 유물은 주로 파형동기, 벽옥제석제품류, 그리고 통형동기 등이었습니다. 그리고 금제품은 삼국의 영향이고, 북부큐슈의 새로운 토기인 스에끼(須惠器)는 바로 가야지역에서 출토되는 도질토기문화에 그 원류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철정 등 4~5세기에 걸쳐 출토되는 다량의 철기류는 모두 가야지역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이들 교섭은 모두 가야의 철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 것인데, 이 시기까지 왜는 아직 철을 생산했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 청동제품들은 가야지역에서는 생산하지 않은 것으로서, 왜가 철을 수입하기 위하여 가야에 바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어쨌든 가야에서의 대형목곽묘의 출현과 일본 고분시대의 시작이 거의 일치하고 있음은 양 지역이 문화적 파동에 따른 정치적 변동이 상호 연동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광개토왕비문의 왜도 이같은 각도에서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가야제국의 멸망은 철을 비롯한 선진문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왜에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일본서기에서 임나일본부 관념을 생겨나게 한 것인데, 가야사의 전개가 왜의 국제환경 내지는 선진문화의 수용, 전파과정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쉽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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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08.26 16:5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