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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현황

현 황

면적, 가구, 인구의 항목으로 현 황 정보를 제공하는 표
면 적 가 구 인 구
53 ㎢ (군의 5.4%) 5,247세대 11,005명 (남 5,375명, 여 5,630명)
(2023. 2월 기준)
행정구역, 의료시설, 주요사업체의 항목으로 현 황 정보를 제공하는 표
행정구역 의료시설 주요사업체
법정9개리, 행정22개리 82반 (42개 마을) 37개소
(보건소 1, 진료소 1, 병원 3, 의원 10, 치과의원 7, 한의원 6, 약국 9)
6개소
(식품업 3, 기타 3)

연 혁

  • 삼한시대 : 변한 내 다라국에 속함
  • 삼국시대(진흥왕 23년, 562년) : 대가야국
  • 신라에 귀속(대량주또는 대야주로 호칭)
  • 통일신라시대(경덕왕 16년, 757년) : 대야주응 강양군으로 개칭
  • 고려시대 : 합주로 승격
  • 조선시대 : 합천현
  • 조선태종 13년(서기 1413년) : 상상리면, 하상리면, 두상면
  • 서기 1914년 : 행정구역 통합으로 합천면이 됨
  • 서기 1979년 5월 1일(대통령령 제9409호) : 합천읍으로 승격

지역특성

  • 합천읍은 합천군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읍소재지를 낙동강 지류인 황강이 감싸흐르고,관내 주요 수계는 합천천과 금양천을 위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모든 행정기관이 합천읍에 집중해 있으며, 동쪽은 율곡면, 남쪽은 대양면과 용주면, 서쪽은 용주면과 봉산면, 북쪽은 묘산면과 경상북도 쌍림면이 각각 경계를 이루고 있다.
  • 도로 교통에 있어 읍소재지를 통과하고 있는 국도 제24호선과 제33호선이 전국 주요도로를 연결하는 주교통로로 이용되고 있으며 생활권이 진주와 대구로 분산되어 있다.

내고장의 역사와 전설

대야성싸움과 죽죽장군

신라의 충신 죽죽(竹竹_장군은 대야성(陜川)사람이며 그의 부친 학세는 찬간(撰干)을 지냈다. 竹竹장군은 선덕여왕때 사지(舍知)가 되어 도독 김품석(金品釋)의 당하(幢下)에서 종사하고 있었다. 김품석은 당시 신라의 재상 김춘추의 사위로서 장인의 천거로 나라의 중요한 국경요새인 대야성 도독으로 부임해 왔다.
한편 신라 23대 선덕여왕 11년(서기 642년) 8월에 백제의 장군 윤충(允忠)은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을 침공하였다. 대야성 도독 김품석은 백제가 침공해오는 위기도 모르고 주색에 빠져 政事와 軍事를 돌보지 않았다. 원래 김품석은 용감하고 지략을 지닌 화랑이었으나, 대야성 도독이 되고 난후부터는 주색과 태평연월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중 잡작스러운 백제 대군의 기습을 받았으니 신라군의 패색은 단번에 짙어저 갈팡질팡하게 되었으며, 더욱이 품석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있던 검일(黔日)은 병기창고를 불사르고 백제군과 내통하여 함께 침공해오니 삽시간에 城안은 수라장이 되어 더 이상 지킬수가 없게 되었다. 그때 品釋의 막료 하찬과 西川이 성위로 올라가 允忠에게 “만약에 장군이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항복을 하겠다” 고 고함을 지르니 允忠은 즉시 이를 수락하였다.
西川은 品釋과 여러 장수들에게 이같은 允忠의 응답을 내세워 항복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竹竹장군은 이를 반대하면서 백제의 反覆無常한 흉계를 더욱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만약에 우리를 유인하려는 윤충의 말을 따르다가는 오히려 복병들에게 일거에 당하고 말것이니 차라리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는 것이 더욱 떳떳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品釋은 竹竹장군 의 말을 끝내 듣지않고 성문을 열게하고 士卒들을 내보내게 하니 나가는 자마다 복병에게 죽고 말았다.

이때 품석과 그의 처도 죽었다. 이 悲報를 듣고 김춘추는 기둥에 의지하여 서서 종일토록 눈도 깜박하지 않고 지내다가 三國으로 분단되어온 조국을 기어코 통일시키겠다는 단호한 결의를 하게 되었다. 죽죽장군은 대야성 싸움에서 끝까지 항복을 반대하고 남은 군사들을 수습하여 城門울 굳게 닫고 백제군에 응전할 채비를 갖추었는데 이때 사지(舍知) 鎔石이 竹竹장군에게 『지금 전세가 불리하므로 항복하여 후일을 도모함만 같지 못하다.』고하자 죽죽장군은 『우리 아버지가 나를 죽죽이라고 이름지어 준 것은 나로 하여금 추운 겨울에도 대나무처럼 그 푸르름을 잃지않고 꺾어도 굴하지 않게 함이다. 내 어찌 죽음 을 두려워 하여 살아서 항복할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최후의 순간까지 성을 사수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같은 죽죽장군의 씩씩한 기상과 호국정신은 오늘날 합천인의 기개(氣槪)가 되었다. 대야성 싸움을 계기로 신라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가져오게 되었다.
대야성 싸움에서 金春秋는 딸과 사위 (品釋)를 잃고 백제에 보복하리라 결심하고 적극적인 對唐外交政策을 펴 삼국통일의 의지를 굳혔던 것 이다. 그리하여 12년후(서기 654년) 김춘추는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하였고 다시 6년후인 태종무열황 7년(서기 660년) 3월 당나라 蘇定方 휘하 13만의 대군과 합세하여 백제를 공략하니 의자왕은 끝내 항복하고 말았다. 그해 8월 승전 축하연에서 태종무열왕은 대야성 싸움에서 반역을 한 검일(黔日)의 사지를 잘라 강물에 던져 그를 처형하였고 또 黔日과 함께 도망을 해서 역적이 된 毛尺을 능지처참 함으로써 대야성 패전의 恨을 설분하였다. 죽죽장군에 대한 기록은 『三國史記』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그 유적은 조선왕조 제12대 仁祖 22년(1644년) 당시 합천군수 曺希仁이 옛 격전지인 대야성에 竹竹장군의 얼을 깊이 심고자 『新羅 忠臣竹竹之碑』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으며, 寒沙 姜大遂가 비문을 지어 후세에 길이 남겼다. 이비는 지금도 대야성 기슭에 서서 陜川人의 긍지를 북돋아 주고 있다.

옥산(玉山)의 유래

조선시대에 제작된 합천군 지도상에 주요 山川의 하나로 올려져있고 동국여지승람에도 나오는데 그 사적을 살펴보면 신라(新羅)가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에게 망할 당시 대야성주(大耶城主) 김억겸의 딸이 경순왕의 천거로 태조의 아내가 되니 신성왕후(神成王后)요, 신성왕후의 친정집이 이 玉山에 있었다.
신성왕후는 태조의 다섯 번째 왕비로서 아들 욱(郁)을 낳으니 여덟 번째 왕자이다. 욱(郁)은 효숙왕후와 사이에 아들 순(詢)을 낳았는데 이분이 고려 제8대왕 현종(顯宗)이시다.

효숙왕후는 순(詢)을 낳고 곧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 욱(郁)은 사천(泗川)으로 귀양을 가게되자 보모를 두어 할머니 신성왕후의 친정인 이곳 玉山에서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서 12세까지 자라게 된다. 왕에 등극한 현종은 할머니 신성왕후의 고향이자 자신이 성장한 강양군(江陽郡)을 합주(陜州)로 승격시켜 진주,거창등 12개 고을이 예속되니 합주(陜州)는 도(道)의 격이 되었다.
그로부터 천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천재지변등으로 강줄기가 바뀌고 제법 큼직한 형태였던 玉山도 홍수에 씻겨져 자취만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신소양 약수터와 강양제

신소양 약수터는 윗마을 뒷골짜기(소명:갱작물) 5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으로는 합천읍 영창리 산 16번지 하부로 합천이씨 종산이다. 구전에 의하면 이 약수는 약 1,000여년전인 신라말엽부터 있었던 덕으로 당시 약수터 바로옆에 작은 절이 창건되었는데 이 절에 거주하는 스님들이 사용하였다고 하며 지금 부근에 있는 전,답도 그때 절에서 일군 것이라 한다.
이 절은 조선 임란때까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절터가 논으로 경작되고 있어 절논으로 부르고 있다. 이곳 약수는 물맛이 좋을뿐만 아니라 피부병에 효능이 있어 옛날 이웃마을 나병환자가 이물로 장기간 목욕을 하여 병을 완치하였다고 하며 그 후로 약효가 떨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도 믈맛이 좋아 이물로 농주를 담그면 그맛이 특별하며 매일 이른 새벽이면 읍소재지와 주민들이 많이 찾아 이용하고 있다. 또 약수터 우측 바로위에는 “강양제”란 제실이 있는데 이 제실에는 한때 조선 3대와인 태종의 화상을 모신곳으로 계양궁이라 불리웠다. 이곳에 태종의 화상을 모시게 된 것은 태종이 등극하기전 청안대군으로 있을 때 전국 명문의 자제들과 21안 동갑계를 조직하였는데 이곳 합천이씨 15세손으로 조선조 참판공을 지낸 中鄕公께서도 그 일인이였으며, 그 계원들이 태종의 등극과 함께 화상을 각자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있던 화상은 그 뒤 난중에 소실되었는데 이 사실이 궁중에 알려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즉시 제실이름을 “강양제”로 환원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인근마을 노인들은 이곳을 계양궁으로 부르고 있으며, 21인계 명단은 합천이씨 목사공파보에 게재되어 있다.

육정 개밥골

장계리 육정마을앞 골짜기를 “개밥골”이라 부르고 있는데 그 연유는 이러하다. 육정마을 위치가 인근 큰 마을들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을뿐 아니라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외진곳으로 옛날에는 주변산들이 나무가 울창하여 한낮에도 혼자서는 외지출입을 하기가 무서웠다고 한다.
그 무렵 마을에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과 가축을 해치므로 이를 막기위해 매월 그믐이면 마을에서 기르는 개를 한 마리씩 이곳에 풀어놓아 호랑이 밥이 되게하여 마을의 다른 피해를 막았다고 한다.

영창석불(石佛)

영창리 의원동 마을 안 골짜기에 가면 약 20여평쯤되는 대지에 옛날 신라시대 것으로 보이는 크고 작은 돌부처 두 개가 있다. 그중 큰 것은 얼굴부분이 많이 훼손되어 있고 작은 것은 목이 떨어져 나가고 없는데 그 사연은 이러하다. 옛날 이 마을에도 다른 마을과 같이 흉년이 들어 생활이 어려울때면 식량이나 가재도구를 훔쳐가는 좀 도둑이 성행하였는데 마을에 도둑이 드는 날 저녁이면 꼭 이 부처가 그집 가장(家長선)꿈에 나타나 서몽을 하여 도독을 막게 하고 하거나 그 이튿날 도둑질한 사람이 잡히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마을에 도심(盜心)이 많은 한 젊은이가 이 부처를 사전에 없애고자 한 밤중에 부처를 손상하여 인근에 묻었는데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즉사하였다고 한다. 돌부처는 그때부터 한동안 매몰되어 있다가 1960년경 그곳에 집을 짓기위해 터를 고르다가 현재 형상으로 발견되어 그 자리에 세웠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에와 빌면 소원성취를한다하여 매월 초하루나 보름등 길일(吉日)에는 인근 마을에서 흔히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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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
합천읍 민원담당 (☎ 055-930-5353)
최종수정일 :
2023.02.10 17:5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