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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이란 마을은 삼국시대 신라, 백제 두나라가 황강을 경계로 하여 싸울 때 갈마장군이란 백제의 장수가 현 마을의 동쪽 400m지점에 갈마산성이란 성을 쌓아 나라를 지켰는데 그후 산성이 있다하여 산성의 성(城)자와 산 밑에 동네가 있다하여 뫼 산(山)자를 따서 성산이라고 마을명칭을 명명하였다. 원래 마을은 현 위치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현마을의 북쪽 2㎞의 황강변 독산이라고 하는 곳에 있었으나 1592년 임란시 수파로 인해 이곳으로 옮겨 왔으며 현 마을앞 느티나무는 약500여년 전에 독산동에 사는 초군들이 심었다는 설이 있다. 성산마을은 갈마산성이라는 삼국시대의 옛성터가 동쪽에 있으며 큰골, 작은골, 성산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연계정 : 고령박씨의 재실
성산2구는 일명 버러실 이라고 하는데 450여년 전부터 밀양박씨가 집단으로 거주하였으나 1700년경 대질병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버러실은 합천 및 인근에서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들어와 살기만 하면 살림이 벌어 진다고 하여 많은 사람이 이사해와 한때는 안버러실 안쪽까지 살았다고 한다. 조선 말엽부터 인근 팔산이란 마을에서 옹기도공이 넘어와 일제 시대에는 황도홍이란 창원 황씨의 도공이 일본왕에게 상을 받았으며 옹기의 전성시에는 200여명의 일꾼들이 일을하여 남한 일대에는 제일 큰 옹기 도요지 마을이었다. 그러나 60년 말부터 세월의 변천에 밀려 지금은 그 자취가 없다. 성산2구는 합천 깃점으로 서쪽으로 지방도 1026호선 주변 용주면의 관문마을이다. 갈마봉을 뒤로하고 앞으로 남쪽에는 시루봉이 있으며, 옆으로는 함안, 거창에서 시작하여 흘러온 물줄기로 대 황강천을 이루고 있다.
고려장터 : 고구려, 고려 때의 장사 양식으로 노쇠한 산사람을 깊이 약10m, 넓이 3m가량의 묘실에 옮겨 두었다가 죽으면 그 자리에 안치하고 금, 은, 보화를 넣은 다음 돌로 쌓아 봉토하는 것인데 성산2구에 거주하고 있는 장광수의 집 안에 고려장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