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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야성싸움과 죽죽장군

대양성 기슭에 세운 비석 전경

신라의 충신 죽죽(竹竹_장군은 대야성(陜川)사람이며 그의 부친 학세는 찬간(撰干)을 지냈다. 竹竹장군은 선덕여왕때 사지(舍知)가 되어 도독 김품석(金品釋)의 당하(幢下)에서 종사하고 있었다. 김품석은 당시 신라의 재상 김춘추의 사위로서 장인의 천거로 나라의 중요한 국경요새인 대야성 도독으로 부임해 왔다.

한편 신라 23대 선덕여왕 11년(서기 642년) 8월에 백제의 장군 윤충(允忠)은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을 침공하였다.

대야성 도독 김품석은 백제가 침공해오는 위기도 모르고 주색에 빠져 政事와 軍事를 돌보지 않았다. 원래 김품석은 용감하고 지략을 지닌 화랑이었으나, 대야성 도독이 되고 난후부터는 주색과 태평연월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중 잡작스러운 백제 대군의 기습을 받았으니 신라군의 패색은 단번에 짙어저 갈팡질팡하게 되었으며, 더욱이 품석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있던 검일(黔日)은 병기창고를 불사르고 백제군과 내통하여 함께 침공해오니 삽시간에 城안은 수라장이 되어 더 이상 지킬수가 없게 되었다.
그때 品釋의 막료 하찬과 西川이 성위로 올라가 允忠에게 “만약에 장군이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항복을 하겠다” 고 고함을 지르니 允忠은 즉시 이를 수락하였다. 西川은 品釋과 여러 장수들에게 이같은 允忠의 응답을 내세워 항복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竹竹장군은 이를 반대하면서 백제의 反覆無常한 흉계를 더욱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만약에 우리를 유인하려는 윤충의 말을 따르다가는 오히려 복병들에게 일거에 당하고 말것이니 차라리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는 것이 더욱 떳떳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品釋은 竹竹장군 의 말을 끝내 듣지않고 성문을 열게하고 士卒들을 내보내게 하니 나가는 자마다 복병에게 죽고 말았다.

이때 품석과 그의 처도 죽었다. 이 悲報를 듣고 김춘추는 기둥에 의지하여 서서 종일토록 눈도 깜박하지 않고 지내다가 三國으로 분단되어온 조국을 기어코 통일시키겠다는 단호한 결의를 하게 되었다. 죽죽장군은 대야성 싸움에서 끝까지 항복을 반대하고 남은 군사들을 수습하여 城門울 굳게 닫고 백제군에 응전할 채비를 갖추었는데 이때 사지(舍知) 鎔石이 竹竹장군에게 『지금 전세가 불리하므로 항복하여 후일을 도모함만 같지 못하다.』고하자 죽죽장군은 『우리 아버지가 나를 죽죽이라고 이름지어 준 것은 나로 하여금 추운 겨울에도 대나무처럼 그 푸르름을 잃지않고 꺾어도 굴하지 않게 함이다. 내 어찌 죽음 을 두려워 하여 살아서 항복할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최후의 순간까지 성을 사수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같은 죽죽장군의 씩씩한 기상과 호국정신은 오늘날 합천인의 기개(氣槪)가 되었다. 대야성 싸움을 계기로 신라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가져오게 되었다. 대야성 싸움에서 金春秋는 딸과 사위 (品釋)를 잃고 백제에 보복하리라 결심하고 적극적인 對唐外交政策을 펴 삼국통일의 의지를 굳혔던 것 이다. 그리하여 12년후(서기 654년) 김춘추는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하였고 다시 6년후인 태종무열황 7년(서기 660년) 3월 당나라 蘇定方 휘하 13만의 대군과 합세하여 백제를 공략하니 의자왕은 끝내 항복하고 말았다.

그해 8월 승전 축하연에서 태종무열왕은 대야성 싸움에서 반역을 한 검일(黔日)의 사지를 잘라 강물에 던져 그를 처형하였고 또 黔日과 함께 도망을 해서 역적이 된 毛尺을 능지처참 함으로써 대야성 패전의 恨을 설분하였다. 죽죽장군에 대한 기록은 『三國史記』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그 유적은 조선왕조 제12대 仁祖 22년(1644년) 당시 합천군수 曺希仁이 옛 격전지인 대야성에 竹竹장군의 얼을 깊이 심고자 『新羅 忠臣竹竹之碑』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으며, 寒沙 姜大遂가 비문을 지어 후세에 길이 남겼다. 이비는 지금도 대야성 기슭에 서서 陜川人의 긍지를 북돋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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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9.07.12 14:50:11